뿌리깊은 '식물국회' 역사···30년간 한번도 제때 출발 못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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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치단체장 선거를 연내에 실시하지 않으면 개원과 관련한 협상에는 일체 협조하지 않겠다는 입장만 반복했다”

1992년 8월 3일 14대 국회 원 구성 협상을 위한 여야 원내대표 회동을 빈손으로 마치고 나온 김용태 당시 민주자유당 원내총무(현 원내대표)는 협상이 결렬됐음을 알리며 이렇게 말했다. 자치단체장 선거 시점을 둘러싼 이견으로 국회 임기가 시작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에도 원 구성 협상을 시작하지 못한 상황에서였다.

1992년 당시 민주자유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용태 원내총무가 의원총회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1992년 당시 민주자유당 총재였던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용태 원내총무가 의원총회에서 대화를 나누는 모습. [중앙포토]

14대 국회, 자치단체장 선거문제로 원 구성 지체

당시 민주자유당은 “총선과 대선, 자치단체장 선거를 한 해에 치르는 것은 무리한 일정”이라며 선거 연기를 주장했다. 반면 김대중·이기택 공동대표에 이철 원내총무 체제였던 민주당은 “자치단체장 선거가 대선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막기 위한 시도”라며 절대 불가 방침을 고수했다. 결국 당시 노태우 대통령과 여당의 강공 속에 자치단체장 선거를 연기하기로 합의한 뒤에서야 원 구성 협상은 마무리됐다. 법정 시한을 125일 넘기고 난 뒤의 개원이었다.

국회는 4년마다 총선을 바탕으로 새롭게 꾸려진다. 그 시작은 원 구성 협상이다. 국회 의장·부의장 및 상임위원장 선출과 관련한 원 구성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은 상태에선 국회 고유 업무인 입법 활동이 불가능하다. 총선 후 새로 구성된 국회는 임기 개시 후 7일 이내에 임시회의를 열어 국회 의장·부의장을 선출하고 그로부터 3일 이내에 상임위원장 선출을 마무리돼야 한다는 국회법 규정이 생긴 것도 그때문이다.

13대 이후 매번 반복된 '늑장 국회'. [자료=국회입법조사처]

13대 이후 매번 반복된 '늑장 국회'. [자료=국회입법조사처]

그럼에도 역대 국회는 원 구성 협상 기한을 지키지 못했다. 짧게는 2주, 길게는 넉 달 넘게 개원하지 못하는 ‘식물 국회’ 상황이 반복됐다. 14대 국회에서 개원 시점이 125일 늦은 뒤 15대 국회에선 일부 의원을 중심으로 자성론이 나왔지만 이때도 임기 개시 후 원 구성에 39일이 걸렸다. 이후 16대(17일)·17대(36일)·18대(88일)·19대(40일)·20대(14일)를 거치는 동안 국회는 단 한 번도 기한에 맞춰 원 구성 협상을 마무리한 적이 없었다. 역대 국회가 매번 시작부터 ‘늑장국회’ ‘식물국회’라는 비판을 받은 이유다.

국회입법조사처는 지난달 28일 ‘제21대 국회 원 구성 일정과 쟁점’ 보고서를 통해 “국회법 규정에도 불구하고 역대 국회에서 원 구성 지연이 계속됐다. 국민의 대표기관으로서 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기본 조직조차 구성하지 못했다는 국민적 비판에 직면했다”고 지적했다.

정치 현안과 원 구성 협상 연동돼 늘상 '늑장 개원'

역대 국회에서 항상 개원 일정이 미뤄진 건 여야가 원 구성과 정치적 현안을 연동해 협상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14대 국회에선 자치단체장 선거 시점 문제로 원 구성 협상이 뒤로 밀렸고, 18대엔 야당이었던 민주당이 최근 5년 이내 광우병이 발병한 나라의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한 수입금지 등을 담은 가축전염병예방법 통과를 원 구성 협상의 전제로 내걸었다. 여야 극한 대치 끝에 당시 한나라당이 민주당 의견을 수용해 가축전염병예방법을 개정하기로 하면서 88일 만에 원 구성 협상이 타결됐다.

2012년 19대 국회 원 구성 협상 당시 이명박 정부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규탄대회에 참석한 민주통합당 지도부. [중앙포토]

2012년 19대 국회 원 구성 협상 당시 이명박 정부 민간인 사찰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하는 규탄대회에 참석한 민주통합당 지도부. [중앙포토]

19대엔 ‘이명박 정부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요구한 민주통합당과 이에 반대하는 새누리당 간 갈등이 불거지며 원 구성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당시 이한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개학하면 학생은 무조건 공부하러 학교에 가야 하는데, 선생님이 맛있는 것 안 사준다고 못 간다고 버티는 게 말이 되냐”며 민주통합당의 협상 태도를 비판했다. 결국 대선을 채 1년도 남기지 않은 상태에서 부담을 느낀 새누리당은 민간인 불법사찰 의혹 국정조사 요구를 수용하며 협상이 가까스로 타결됐다.

13일 국히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김태년 원내대표. 임현동 기자

13일 국히에서 열린 더불어민주당 최고위원회의에 참석한 김태년 원내대표. 임현동 기자

21대 국회에서 177석의 여당을 이끄는 김태년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12일 라디오 인터뷰를 통해 “원 구성을 표결로 진행하는 것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했다. 미래통합당과의 협상이 지지부진할 경우 여당 의석수를 바탕으로 원 구성을 밀어붙이는 방안도 고려하겠다는 의미다. 민주당 한 중진 의원은 “‘일하는 국회’를 앞세운 21대 국회에서도 늑장 개원하는 역사를 되풀이할 순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은 “슈퍼 여당이 의석수만 믿고 밀어붙이기를 시도하는 건 오만”이라며 좌시하지 않겠다는 방침이다. 현행 국회법상 이번 국회에선 다음 달 5일까지 국회 의장·부의장을 선출하고 8일까지 상임위원장을 선출해 원 구성 협상을 마쳐야 한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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