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에서] ‘관제 기부’에 속상한 대기업 임원들 “돈 받아 아동시설 돕고픈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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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이수기 산업1팀 기자

이수기 산업1팀 기자

대기업과 소속 임원들이 고민에 빠졌다.

일부 기업서 ‘기부 동참하라’ 독려 #정부·총수 눈치 안 볼 수 없어 고심

일부 대기업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극복을 위해 정부가 지급 중인 긴급재난지원금의 기부를 소속 임원들에게 독려하면서다. 이와 관련 ‘관제 기부’ ‘개인의 자유 침해’라는 비난이 나오면서 대기업도 임원들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상황에 부닥치게 됐다.

12일 재계에 따르면 5대 그룹의 한 계열사 인사부서에서 임원들에게 e메일과 유선 전화 등을 통해 “그룹의 방침이니, 긴급재난기부금 기부에 동참해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했다고 한다. “삼성과 현대자동차 등 5대 그룹이 비슷한 방식으로 기부할 것”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실제 최근 5대 그룹의 부사장급 관계자들이 모이는 조찬모임에서 관련 논의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도 의견이 엇갈려 별다른 결론을 내지는 못했다.

익명을 원한 재계 고위 관계자는 “그룹마다 입장이 다를 뿐 아니라 기업별로 재난지원금 신청 여부에 대한 가이드라인이 전달된 적도 없다”면서 “그럼에도 회사와 다른 임원들을 의식해 대부분의 임원이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같은 임원이라도 직급에 따라 반응이 갈렸다. 최고경영자(CEO)급 임원들은 대체로 “긴급재난지원금을 신청하지 않겠다”는 입장이 더 많았다. 반면 상무급으로 내려올수록 “긴급재난지원금을 받고 싶다”는 반응이 다수다.

핵심은 기부가 얼마나 자발적인가다. 임원은 강하면서도 약한 존재다. 높은 연봉을 받지만, 사실 1년 단위로 계약을 연장해 ‘임시 직원’으로도 불린다. 기업 총수나 정부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대기업 임원들에 대한 기부 독려는 임원 입장에선 의무 사항으로 를 여겨질 수밖에 없다. 거대 여당이 나서서 기부 독려를 하는 판이니 기업들이 정권에 잘 보이기 위해 임원 기부를 볼모로 삼는 것이란 지적까지 나온다. 물론 애초의 원인 제공자는 이렇게 기업들이 눈치봐야 하는 상황을 만든 정부와 여당이다.

기부를 둘러싼 논란은 과거에도 있었다. 지난 정부에서 추진했던 ‘은행별 청년희망펀드 기부 현황’ 자료를 분석한 결과 전체 기부자의 52%가 이 펀드를 수탁 중인 13개 은행의 직원이었다고 한다. 청년희망펀드는 청년 일자리 창출에 쓰일 재원 마련을 위해 조성됐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이 펀드의 1호 기부자였고, 이후 대기업 등의 기부가 잇따랐다.

당시를 생생히 기억하는 재계 관계자는 “그때 수백억원을 냈었지만, 그 돈이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 대기업 임원은 “재난지원금 100만원 받은 다음에, 차라리 내 돈 100만원을 더 보태서 내가 후원하고 싶은 어린이 관련 시설에 기부하고 싶다”고 털어놨다. 개인이 기부하고 싶은 곳에 기부하는 것, 기업이 투자하고 싶은 곳에 투자하는 것. 이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의 시작이다.

이수기 산업1팀 기자 lee.sook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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