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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정의연 회계 투명성 요구가 가혹하다는 분들께

중앙일보

입력

지난 12일 오전 회계 투명성 논란에 휩싸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서울 마포구 사무실 앞 모습. 연합뉴스.

지난 12일 오전 회계 투명성 논란에 휩싸인 '일본군 성노예제 문제 해결을 위한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서울 마포구 사무실 앞 모습. 연합뉴스.

시민단체 회계가 열악한 이유 

비영리단체 희망나눔동작네트워크(희망동네)에서 사무국장을 맡은 류호근씨는 최근 페이스북에 장문의 글을 남겼다. 시민단체 회계처리가 열악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절절히 설명한 글이다. 대부분 시민단체가 '잔액 맞추기'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다고 전했다. 그는 "희망동네가 받은 월 후원금은 100만원 안팎이고, 상근 활동가 활동비도 월 20~50만원 수준인데, 이런 사정을 외부에 공개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다"는 심경도 밝혔다.

소규모 시민단체 사정은 류 씨가 밝힌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을 듯하다. 현장 활동가 한 명 구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회계 전문 인력을 둔다는 건, 입에 풀칠도 어려운 집에 자산관리 컨설팅을 받으란 얘기처럼 버겁다. 그래서 최근 정의기억연대(정의연)의 부실 회계 논란을 놓고 시민단체에 너무 가혹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 아니냐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도 이해 못 할 일은 아니다.

세금 수조원 지원받고 투명성은 무시? 

그러나 시민단체에게 '투명성'은 반드시 지켜야 할 책임이다. 규모가 클수록, 후원자가 많을수록, 책임은 더 크다. 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면 더 엄격한 회계 기준이 적용되는 것과 마찬가지다. 시민단체도 규모가 커지면 동아리 수준을 넘어선 투명성을 갖추길 요구받는다.

정의연을 보자. 이 단체가 지난해 받은 기부금은 8억2500만원에 달한다. 여성가족부로부터는 지난 2017년부터 총 15억여원의 보조금 예산을 배정받았다.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국가 보조금은 납세자들이 낸 '혈세'이기도 하다. 이만우 고려대 경영대 교수는 "공익법인에는 각종 법인세·부가가치세 등의 면제 혜택이 주어진다"며 "사회적 지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용 내역도 투명하게 공개돼야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기부금을 썼다고 밝힌 내용도 논란거리였다. 정의연은 2018년 기부금 모집·사용명세 보고서에서 기부금 모집액 6억3500만원 중 국제·남북 연대사업 등에 2억665만원을 썼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지원에는 2238만원만 썼다. 이는 홍보물 제작, 홈페이지 관리 등 기획·홍보사업에 쓴 돈 5538만원보다도 적은 액수다.

이 같은 정의연 지출 내용을 보면 혁명 전 프랑스 절대왕정 회계장부를 연상케 한다. 당시 재무총감 네케르가 공개한 장부에는 왕정의 총지출액 2억5000만 리브르 중 무주택 빈민층에는 고작 90만 리브르를 쓴 내역이 나온다. 이 회계장부가 파리의 시민들을 분노케 한 것처럼, '후원금이 어디 쓰였는지 모른다'는 이용수 할머니의 분노도 정의연 회계 보고서를 보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정의기억연대 출신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수요집회 기부금과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지난 10일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 연합뉴스.

정의기억연대 출신 더불어시민당 윤미향 당선인에 대한 수요집회 기부금과 한일 위안부 합의 관련 논란이 불거진 가운데 지난 10일 종로구 주한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에 빗물이 맺혀 있다. 연합뉴스.

회계 투명성 논란, 시민운동 '성장통'

정의연이 위안부 피해 역사를 알리는 등 의미 있는 사업을 해온 공로를 모르지 않는다. 회계 투명성을 갖추라는 요구가 시민운동을 폄훼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한 단계 성장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할 성장통이다. 기부자와 국민이 낸 세금 지원으로 성장한 시민단체에게 투명한 회계는 의무이자 책임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아직 살아계신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그들을 위해 기부한 돈이 어떻게 쓰였는지도 모른 채로 여생을 보내게 해선 안 될 일이다.

세종=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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