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이너프 딜’ 안 먹혀…정부, 북 식량 지원으로 돌파구 모색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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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상회담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백악관 캐비닛룸에서 양국 주요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업무 오찬을 겸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 11일(현지시간) 백악관 캐비닛룸에서 양국 주요 참모들이 참석한 가운데 업무 오찬을 겸한 확대 정상회담을 하고 있다. [강정현 기자]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12일 한 언론 인터뷰에서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두고 ‘하노이 노딜(no deal)’에 이은 ‘워싱턴 노딜’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박3일간의 방미를 통해 미국과 북한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기 위한 동력 확보에 직접 나섰지만 한국이 희망했던 수준의 합의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평가한 것이다.

하노이 이어 워싱턴 ‘노딜’ #트럼프 “북한에 식량 지원 괜찮다” #정부 차원 지원도 용인 가능성 #식량 지원해도 북 태도 바뀔지 의문 #3차 북·미 정상회담까지는 먼길

이에 따라 한·미 정상회담을 통한 ‘굿 이너프 딜’(충분히 괜찮은 안) 합의→이를 통한 대북 설득 및 제4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3차 북·미 정상회담 개최 수순에 일단 적신호가 켜졌다.

정부는 우선 대북 특사 파견 카드를 꺼낼 것으로 예상된다. 한·미 정상회담 결과를 토대로 이번엔 북한 설득에 나설 차례이기 때문이다. 정부 고위당국자는 “문 대통령이 귀국하면 본격적으로 북한과 접촉해 남북 정상회담이 조기에 개최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신범철 아산정책연구원 안보통일센터장은 “(시간은 다소 부족하지만) 4·27 선언 1주년에 남북 정상회담을 개최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정부가 곧 북한에 특사를 보낼 것”이라고 내다봤다.

문제는 북한을 설득할 카드가 마땅찮다는 점이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이번 한·미 정상회담 결과물을 보면 북한이 받을 수 있는 내용이 사실상 없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북한에 제시할 일종의 ‘당근’으로 미국과 협의를 진행한 비핵화 상응조치의 핵심은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재개와 대북 인도적 지원이었다. 북한이 하노이에서 열린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 요구한 2016~2017년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다섯 건의 민수 경제 관련 부분 해제는 미국 내 대북 강경 여론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실제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날 정상회담에서도 중국과 러시아의 대북 제재 협조를 간접적으로 압박하기도 했다. 그는 추가 발언까지 하며 “중국과 러시아에 감사를 표한다. 두 나라가 더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지만 국경 문제에 도움을 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에 대해서는 “올바른 시기에 재개한다면 커다란 지지(great support)를 보낼 것이지만 지금은 올바른 시기가 아니다”고 선을 그었다. 그나마 트럼프 대통령은 대북 인도적 지원에 대해서는 다소 유연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이날 회담에서 “한국이 북한에 식량 등 다양한 것들을 지원하는 건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정부는 2017년 유니세프와 세계식량계획(WFP)의 북한 모자 보건·영양 지원 사업에 800만 달러를 지원하기로 결정했지만 실제 집행은 못 해왔다.

정부 차원의 대북 식량 지원은 과거 비핵화 협상 교착 상태를 해소하기 위한 유효한 수단 중 하나였다. 가장 최근 사례는 버락 오바마 행정부 때인 2012년 24만t의 대북 영양 지원을 대가로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영변 우라늄 농축 시설 가동 중단을 약속한 2·29 합의였다. 마침 북한은 최근 식량 부족으로 국제기구와 러시아 등 우방국에 긴급 원조를 요청하고 있는 상태다.

정부 관계자는 “국제기구 등의 지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며 “정부가 지원에 나선다면 규모 면에서 사실상 배급 체계가 붕괴한 북한이 직면한 식량난 해소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북한의 움직임은 과거와는 다소 다르다. 북한이 비핵화 상응조치로 유엔 제재 완화를 공개적으로 요구한 상황에서 식량 지원을 받고 추가적인 양보를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특히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지난 11일 최고인민회의 직전에 개최한 노동당 제7기 4차 전원회의에서 ‘자력갱생’을 강조했다. 양보보다는 대북 제재에 맞서 버티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것이다.

한 전직 고위 외교관리는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대북 식량 지원과 비핵화 조치 사이에 등가성이 없어졌다”고 우려했다. 이 관리는 “특히 북한이 이번 정상회담 결과를 지켜보면서 한국이 미국쪽으로 골포스트를 옮겼다고 볼 가능성이 크다”며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처럼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의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을지는 미지수”라고 덧붙였다. 일각에서 지난해와는 달리 북한이 오히려 한국보다는 미국과의 직거래를 선호할 것이란 주장이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차세현·이유정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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