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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 성장" 구호를 왜 매년 외쳐야 하는 걸까

중앙일보

입력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읽기 (23)

달력을 뜯어서 펼쳐보니 표지를 넘기자마자 시무식이다. 종무식과 시무식이 날짜상 거의 맞닿아 있는데, 왜 굳이 나눠 놓았을까? [사진 pixabay]

달력을 뜯어서 펼쳐보니 표지를 넘기자마자 시무식이다. 종무식과 시무식이 날짜상 거의 맞닿아 있는데, 왜 굳이 나눠 놓았을까? [사진 pixabay]

달력을 본다. 회사 종무식이 머지않았다. 이렇게 올해도 끝이 난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2019년 달력을 받았다. 뜯어서 펼쳐보니 표지 넘기자마자 시무식이다. 종무식과 시무식이 날짜상 거의 맞닿아 있는데, 왜 굳이 나눠 놓았을까?

어쩌면 모두가 들떠 있는 12월에는 일 얘기를 꺼내기가 껄끄러워서 그런 게 아닐까? 종무식 때는 웃으면서 수고했다는 얘기로 대강 마무리하고, 1월이 되자마자 강당에 모여서 엄숙한 목소리로 ‘올해는 더 성장해야 합니다…!’라는 얘기를 하려고 말이다.

‘올해는 더 성장을…!’ 시무식 때마다 빠지지 않는 얘기다. 작년에 고생들 했고, 올해는 더 이를 악물자는 얘기를 기업을 습관처럼 해오고 있다. 그런데 대관절, 왜 성장이 필요한 걸까? 왜, 새해에는 항상 작년보다 ‘더’ 해야 할까?

‘최초의 은행’ 이야기는 이 원인을 잘 설명해준다. 지금의 돈이 아직 발명되기 전, 사람들은 금을 거래의 매개로 사용했다. 그런데 무거운 금을 일일이 가지고 다닐 수가 없어, 튼튼한 금고를 가지고 있던 금세공업자들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금세공업자들은 수수료를 받고 금을 맡아주면서 ‘보관증’을 써주었는데, 보관증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시장에서 실제 금 대신 보관증으로도 거래가 가능해지기 시작했다. 최초의 화폐인 셈이다.

수수료로 돈을 벌게 된 세공업자들은 금을 맡아주는 것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금을 빌려주는 것으로도 돈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낸다. 그래서 그들은 '대출'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다. [사진 스티브비드미드]

수수료로 돈을 벌게 된 세공업자들은 금을 맡아주는 것으로도 돈을 벌 수 있다면, 금을 빌려주는 것으로도 돈이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낸다. 그래서 그들은 '대출'이라는 개념을 고안해 냈다. [사진 스티브비드미드]

수수료로 돈을 벌게 된 세공업자들은 한 가지 꾀를 떠올렸다. 금을 맡아주는 것으로 돈을 벌 수 있다면, 금을 빌려주는 것으로도 돈을 벌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그들은 ‘대출’이란 개념을 고안해냈다. 반발하는 금 예치자들에게는 ‘예금 이자’를 약속했다. 은행의 첫 등장이었다.

대출이자는 늘 예금이자보다 많다. 그래서 은행들은 가진 금보다 더 많은 보관증을 통용시켰다. 금고 속의 금이 100개면 시장에 돌고 있는 보관증도 100개여야 한다. 그런데 금은 그대로이고 보관증만 150개로 늘어나면 어떻게 될까? 자연스럽게 보관증의 가치는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인플레이션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현대사회에서도 새로운 화폐가 계속 발행되므로 돈의 가치는 늘 떨어진다. 그래서 올해의 만 원과 내년의 만 원은 가치가 달라진다. 개인이, 회사가 내년에는 늘 올해보다 돈을 더 벌어야 하는 이유다.

『몰입의 즐거움』의 저자 미하이 칙센트미하이는 개인이 지루함에서 벗어나 ‘몰입’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고난도의 과제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성장 목표는 사회구성원들이 지루함에 시달리게 하지 않게는 해줄 것이다. 그런데 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이 ‘성장’ 기조에는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일까? 얼마 전 들은 갑수 씨 얘기를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갑수 씨는 작은 그릇공장을 운영하는 자영업자다. 어느 날 그에게 A사의 이 부장이 찾아와, 백화점에 납품하게 해줄 테니 부지런히 물량을 찍어내라고 한다. 갑수 씨, 내년이면 중학교 가는 딸 생각하며 “열심히 하겠습니다!”라고 인사한다.

어, 그런데 이 부장, 계약하면서 현금이 아닌 어음을 주고 갔다. 일부 부재료는 외상으로 사더라도, 원재료는 현금 주고 사와야 하는데… 갑수 씨는 어쩔 수 없이 어음을 가지고 은행에 가서 대출 신청을 한다. 경기가 계속 좋았던 탓에 이런 대출심사를 많이 해왔던 은행은, 별생각 없이 대출서류에 도장을 찍는다. 갑수 씨는 대출받은 돈으로 원재료를 사고 부지런히 공장을 돌린다.

곧 있으면 많은 돈이 들어오겠지…그러면 좀 넓은 집으로 이사 갈까, 첫째도 이제 자기 방이 필요할 때가 됐는데… 그런데 돌연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날아든다. A사가 도산했다는 게 아닌가! 맙소사. 어음은 휴지가 됐다. 갑수 씨는 잘하면 빚쟁이, 여의치 않으면 감옥에 가게 생겼다. 위기는 갑수 씨에게만 닥친 것이 아니다. 그를 믿고 부재료를 외상 납품한 협력사 B, C, D도 마찬가지다. B, C, D에게 외상판매를 해온 E, F, G, H, I도 마찬가지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 한 장면. 갑수 씨 이야기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1997년 IMF 사태를 다루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국가부도의 날' 한 장면. 갑수 씨 이야기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은 1997년 IMF 사태를 다루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갑수 씨의 이야기는 최근 한 영화에서 본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이라는 이 작품은 1997년 IMF 사태를 다루고 있다. 주요 인물들은 경제위기 사실을 공표하고 국민을 도우려는 자, 위기를 기회 삼아 한몫 챙기려는 자, 그 모든 상황의 정점에 선 채 정치적인 판단만을 내리고 있는 자다.

그리고 갑수 씨가 있다. 갑수 씨는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이끌려 다니다가 결국 파산 위기에 내몰린다. 갑수 씨의 패착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성장을 부르짖는 국가가 있었고, 갑수 씨 개인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어음’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대출을 해준 은행이 있다.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두고 거래를 할 수 있게 두면 여러 가지 비극이 생긴다. 금 보관 증의 남발도 그렇고, 갑수 씨의 어음도 마찬가지다. 채권을 할인해서 파는 파생상품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기 시작했던 2008년 미국발 경제위기도 그런 얘기다. 이 모든 사건의 기저에는 ‘빚을 내서라도 성장해야 한다’라는 이데올로기가 깔렸다.

방사능비에 젖으며 기러기 난다
바이칼 호로 가나, 마스크도 우비도 없이

문명의 세례인가, 물은 시작이 없는데
마침표처럼 내리는 빗방울들

철 있어 철없이 푸른 들
마늘과 양파와 보리밭 긴 이랑

방사능 번진 태평양을 돌아올 연어여
너를 반성문처럼 반갑게 껴안을 우리 몇이나 될 것인가

환호하던 원자력 밝은 빛 어둠 되어
인류의 눈빛 적신다 봄비 내린다
-함민복, 『봄비, 2011, 한반도, 후꾸시마에서 날아온』 전문

일본 후쿠시마 원전 앞 바다. 시인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두고 시름 한다. 연어 떼가 방사능 번진 태평양을 돌아 우리에게 와도 우리는 '반성문'처럼 읽지 않는다. 성장 이데올로기가 가진 위험은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마모시킨다는 데 있다. 김현기 기자

일본 후쿠시마 원전 앞 바다. 시인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두고 시름 한다. 연어 떼가 방사능 번진 태평양을 돌아 우리에게 와도 우리는 '반성문'처럼 읽지 않는다. 성장 이데올로기가 가진 위험은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마모시킨다는 데 있다. 김현기 기자

시인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두고 시름 한다. 연어 떼가 방사능 번진 태평양을 돌아 우리에게 와도, 우리는 그것을 ‘반성문’처럼 읽지 않는다. 눈이 온통 성장에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장 이데올로기가 가진 위험은, 그것이 위기를 감지하는 능력을 마모시킨다는 데 있다.

문득 최근 연이어 발생한 끔찍한 사건들이 떠오른다. 통신구에 불이 나고 온수관이 파열되고 기차가 탈선하기까지, 관계자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어쩌면, 성장을 부르짖느라 그들에게 중요한 감각 하나가 계속 마모되어왔던 건 아닐까.

IMF도 어느덧 옛날얘기가 되어간다. IMF 때 당신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하고 물으면 신입사원이었거나 대학생이었다는 사람들이 필자 주변에는 많다. 필자는 초등학생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 채, 엄마가 집에서 금붙이들을 찾아내는 것을 지켜봤었다.

하지만 영화는 그런 위기가 또 올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그때는 필자, 먼젓번처럼 태평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문명 세계의 거의 모든 사람을 태운 이 ‘성장행’ 기차는, 계속 이 속도로 움직여도 괜찮을 것인가?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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