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지배구조 개편도 온갖 눈치 살펴야 하는 한국 기업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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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순환출자를 없애고 지배구조를 개편하려는 현대자동차그룹의 시도가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의 반대를 넘지 못하고 좌절됐다.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를 분할하고, 모듈·AS부품 사업 부문은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추진했다. 그러나 오는 29일로 예정된 현대모비스 임시주주총회가 어제 취소됐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여러 주주분들 및 시장과 소통이 많이 부족했음을 절감했다”며 “심기일전하는 마음으로 지배구조 개편 방안을 보완하고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이 주총을 취소한 건 지배구조 개편안이 주총에서 부결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다. 엘리엇은 외국인 주주들을 대상으로 반대표를 모았고, 외국인 주주의 의결권 행사에 영향력이 큰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글래스루이스도 최근 잇따라 반대 권고를 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국내 의결권 자문기관도 반대 의견을 내면서 주총 통과는 사실상 힘들어졌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은 모비스 지분 9.8%를 가진 국민연금과 자문 계약을 맺고 있다.

정부 입장도 난처해졌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시장의 요구에 부응해 지배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을 긍정적으로 본다”고 밝힌 바 있다.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지난달 현대차그룹의 지주회사 전환을 요구하는 엘리엇의 주장에 대해 “금산분리를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라며 제동을 걸기도 했다.

작금의 현대차그룹 상황은 한국 대기업이 처한 안팎의 어려움을 여실히 보여준다. 정부는 속도감 있는 지배구조 해법을 압박하고, 외국 헤지펀드는 그 틈새에서 주주 이익 보호를 내세우며 눈에 불을 켜고 자기 이익을 챙긴다. 정부와 외국계 펀드 사이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넛 크래커’ 신세가 따로 없다. 예정된 주총조차 열지 못하는 2018년 한국 대기업의 암울한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