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공시생 44만명 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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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서경호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지방 국립대 화학과를 나온 한정오(정유미 분)는 이력서를 250여 통, 면접을 70번 넘게 봤지만 괜찮은 직장을 끝내 얻지 못했다. 처음엔 스펙이 문제인 줄 알았는데 가장 큰 이유는 ‘여자라서’였다.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기 위해, 엄마에게 떳떳한 딸이 되기 위해 공시생이 됐고 결국 꿈을 이뤘다. 중앙경찰학교에서 교육받으며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다짐하듯 되뇐다.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tvN 드라마 ‘라이브(Live)’ 주인공 얘기다.

지난 주말 4953명을 뽑는 국가공무원 9급 공채 필기시험에 15만5388명이 응시해 40.9대 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이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지난달 ‘현대사회와 행정 28권’에 게재된 ‘공무원시험준비생 규모 추정 및 실태에 관한 연구’(김향덕·이대중)에 따르면 공시생 규모는 44만 명으로 추정됐다. 이는 우리나라 청년 인구(만 20∼29세·644만5000명)의 6.8%, 지난해 수능 응시자(59만3000여 명)의 75%에 해당한다. 논문에서 공시생 413명에게 시험 준비 동기를 물었더니 역시 직업 안정성(54.5%)을 꼽는 이가 가장 많았고 안정된 보수(21.3%), 청년실업 심각(14.3%) 등의 순이었다. ‘국가 봉사’라는 응답은 2.9%에 그쳤다. 하긴 드라마 ‘라이브’에서 사명감보다 밥 먹고 사는 게 더 급하다는 꺽다리 염상수(이광수 분)도 불법 다단계 회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다가 경찰에 입문한다.

공시 열풍을 공시생 열 명 중 예닐곱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고, 다른 진로를 가는 데에도 도움이 안 된다고 답했다. 공시 열풍이 결국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국가적 손실이라는 점을 공시생 스스로 잘 알고 있다는 얘기다. 나아갈 방향도 정확하게 짚었다. 이들이 대안으로 꼽은 건 양질의 청년 일자리 창출(46.4%)과 기업 근무환경 개선(31.3%)이었다.

드라마 속 한정오와 염상수는 때로는 감정노동자처럼 시달리면서도 일상에서 상식을 지켜가는 좋은 경찰이 될 것 같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 노량진 공시촌을 방문해 예비 공무원들의 꿈을 ‘격려’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건 드라마 주인공들처럼 막판까지 몰리다가 공시생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좋은 일자리를 민간에서 만드는 것이다. 청와대의 일자리 상황판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그곳에 공시생 숫자를 가장 크게 걸어놨으면 한다. 공시생 숫자가 줄어들지 않는 한 청년 일자리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서경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