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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 시트, 그리고 동물농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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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안혜리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안혜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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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을 닮아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억하시오. 정복하더라도 악한 짓거리를 모방해선 안 됩니다. 인간처럼 침대에서 자도 안 되고 술 마셔도 안 됩니다. "

늙은 수퇘지 메이저가 비참한 노예생활을 한다고 생각하는 메이너 농장의 동물들에게 반란의 꿈을 얘기하고 숨을 거둔 직후, 동물들은 정말로 인간 농장주 존즈를 쫓아냈다. 머리 좋은 돼지들이 앞에 나섰다. 메이저의 가르침을 모든 동물이 따라야 할 일곱 계명으로 줄여 헛간에 큼지막하게 써뒀다. 내용은 대충 이랬다. '두 발로 걷는 것은 적이다. 네 발로 걷거나 날개를 가진 것은 친구이다. 어떤 동물도 침대에서 자거나, 술을 마시거나, 다른 동물을 죽여선 안 된다. 무엇보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
존즈 아이들이 버리고 간 책으로 스스로 글을 깨친 돼지와 달리 다른 동물들은 일곱 계명을 외우기도 벅찼다. 그래서 돼지들은 이렇게 한 문장으로 줄였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 ' 머리 나쁜 양도 이건 쉽게 외울 수 있었다.
우유 배급 문제나 회의 중단 등 돼지들의 일방적인 정책 결정에 대해 몇몇 동물이 문제 삼으려 하면 느닷없이 양들이 튀어나와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나쁘다"를 외쳐대는 통에 아무도 제대로 항의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꼭 돼지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지며 분위기가 수그러 들었다. "설마 존즈가 돌아오길 바라는 건 아니겠죠?""이 모든 건 우리 개혁을 방해하려고 여기에 스파이를 심어둔 존즈 일당이 퍼뜨린 거짓말이요. "
어느 날 돼지들이 침대에서 잔다는 소문이 돌았다. 심기가 불편해진 누군가가 계명에 어긋난다는 걸 기억해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헛간에 가보니 이렇게 쓰여 있었다. "어떤 동물도 '시트를 깔고' 침대에서 자면 안 된다. " 돼지는 의아해하는 동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침대에서 못 잘 이유라도 있소? 규칙이 금지한 건 침대가 아니라 시트요. "

돼지들은 거나하게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당당했다. "술을 마시는 게 뭐가 문제요? '너무 지나치게' 마시면 안 될 뿐이요. " 반역자와 공모했다며 처참하게 암탉을 죽이고서도 "죽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이유 없이' 죽여선 안 되는 것일 뿐"이라고 했다.
동물들은 전보다 더 배불리 먹게 됐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두 발 달린 주인을 모실 필요 없는 농장의 삶에 만족했다. 네 발 달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니까.
돼지가 양들을 데리고 비밀스럽게 무슨 노래를 가르친다던 어느 날 동물들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돼지들이 두 발로 서서 걷는 게 아닌가. 이번에는 어떻게든 항의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르는 순간 양들이 외치기 시작했다. "네 발은 좋고 두 발은 더 좋다. "
대체 일곱 계명이라는 게 원래 있기는 했던 걸까. 혼란스런 마음으로 헛간을 찾은 동물들 눈 앞엔 하나의 계명만 남아 있었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들보다 더 평등하다. '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왼쪽)가 9일 김기식 금감원장을 '황제외유'라고 비판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자유한국당 김성태 원내대표(왼쪽)가 9일 김기식 금감원장을 '황제외유'라고 비판하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건 영국 작가 조지 오웰이 1944년에 쓴 그 유명한『동물농장』얘기일 뿐이다. 그러고보니 지금 대한민국도 야당 원내대표로부터 "내로남불의 끝판왕" 소리를 듣는 어떤 인물 때문에 혼란스럽다. 침대(접대성 외유)에서 자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시트(특혜)만 안 깔면 인턴 데리고 여행해도 별 문제(해임할 정도)가 아니라니. 게다가 이 모든 소란이 두 발 달린 적(개혁 반대 적폐세력)의 음모 탓이라니 말이다.

안혜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