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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바닥 신호등’이 스몸비 사고 막을까 … 경찰청, 국내 첫 설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경찰, ‘바닥 신호등’ 정식 신호장치 도입 추진  

동대구역 환승센터 삼거리 횡단보도 앞 바닥에서 녹색과 적색으로 빛나는 일직선 형태의 물체가 ‘바닥 신호등’이다. 경찰이 지난달 시범 작동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경찰청]

동대구역 환승센터 삼거리 횡단보도 앞 바닥에서 녹색과 적색으로 빛나는 일직선 형태의 물체가 ‘바닥 신호등’이다. 경찰이 지난달 시범 작동했을 때 촬영한 사진이다.[사진 경찰청]

“어머, 이게 뭐야?” 횡단보도 앞에서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던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바닥에 켜진 ‘신호등’ 때문이었다. 일직선 형태(폭 10cm, 길이 6~8m)의 이 신호등은 일반 보행자 신호등과 동시에 적색이나 녹색으로 바뀌었다. 점자블록 부근 바닥에 매립된 LED 전구가 빛을 냈다. 처음 보는 ‘바닥 신호등’의 등장에 사람들은 신기해했다.

지난달 대구시 동대구역 환승센터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펼쳐진 풍경이다. 시선이 바닥을 향해 있던 ‘스마트폰 보행자’들은 고개를 들지 않고도 신호의 변경을 알 수 있었다. 적색의 바닥 신호등 뒤에 멈춰 섰고, 이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신속히 건넜다.

스몸비가 바꾼 풍경 … 신호등이 바닥에

이곳 횡단보도 앞 6곳에 ‘바닥 신호등’을 설치한 건 경찰청이다. 경찰청이 ‘바닥 신호등’(가칭)을 정식 보행자 신호장치로 도입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신호등을 바닥에도 설치해 고개를 숙이고 걷는 ‘스몸비(스마트폰+좀비)’의 교통사고를 막기 위해서다.

‘스몸비’ 현상이 전통적인 신호등의 개념마저 바꿔놓고 있다. 19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말 경찰청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에서 ‘바닥 신호등 시범 운영안’이 통과됐다. 이에 따라 지난 1월 대구시에 설치하고 한 달여간 시범 작동시켰다. 이달 말 정식 가동을 앞두고 현재는 잠시 중단한 상태다.

경찰청 관계자는 “기존의 신호등은 스마트폰에 빠진 보행자의 주의를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달라진 보행 문화에 맞는 방식으로 신호를 알려줄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국내 경찰이 바닥 신호등을 설치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한 시민이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다 바닥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건너고 있다.[사진 경찰청]

한 시민이 고개를 떨구고 스마트폰을 보다 바닥 신호등이 녹색으로 바뀌자 건너고 있다.[사진 경찰청]

수원시에 곧 설치, 서울시도 검토 중  

‘바닥 신호등’은 경기도 수원시와 양주시에도 이달 안에 등장할 예정이다. 경찰은 이달 말부터 대구시‧수원시‧양주시 세 지역에서 이 신호등을 동시에 작동시킨다. 이후 도로교통공단과 함께 약 3개월간 신호 준수 등에 효과가 있는지 분석한다. 서울시와 전남 순천시도 설치를 검토하고 있다. 경찰청 관계자는 “한 달여간 대구시에서 시범 운영하며 관찰한 결과 시민들이 신호를 준수하는 효과를 보였다”며 “이전엔 스마트폰에 정신이 팔려 신호등이 적색인데도 횡단보도로 나오는 등 위험천만한 상황이 많았다”고 말했다.

적색을 띈 바닥 신호등 뒤에서 일부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사진 경찰청]

적색을 띈 바닥 신호등 뒤에서 일부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사진 경찰청]

‘바닥 신호등’은 시범 운영에서 효과가 입증되면 올 9월쯤 ‘교통안전시설 심의위원회’에서 정식 신호장치로 인정될 가능성이 높다. 지자체가 ‘바닥 신호등’을 기존 신호등의 보조 장치로 설치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현재 널리 쓰이고 있는 신호등 보조 장치로는 신호등 잔여 시간 표시기, 시각 장애인용 음향 신호기 등이 있다.

횡단보도 앞에 일직선 형태로 설치된 바닥 신호등은 어두운 밤에 더 선명하게 보인다.[사진 경찰청]

횡단보도 앞에 일직선 형태로 설치된 바닥 신호등은 어두운 밤에 더 선명하게 보인다.[사진 경찰청]

현대해상 기후환경교통연구소에 따르면 보행 중 스마트폰 사용으로 발생하는 교통사고는 2013년 117건에서 지난해 177건으로 5년 사이 1.5배 증가했다. 횡단보도도 ‘스몸비 위험지대’가 됐다. 도로교통공단이 2015년 전국 중·고교생과 성인 971명을 대상으로 ‘보행 중 스마트폰을 사용하다 교통사고를 경험했거나 날 뻔했을 때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물었다. 그 결과 응답자의 약 18%가 ‘횡단보도 통행 중’이라고 답변했다. ‘주택가 이면도로 보행 중’(50%)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수치였다.

지난 16일 오후 서울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20분 동안 관찰했더니 116명 중 33명(28.4%)이 스마트폰을 보며 횡단보도를 건넜다. 경찰청 관계자는 “스마트폰을 보느라 신호등이 적색일 때 건너거나, 녹색불이 깜빡일 때 뛰다 신호등이 적색으로 바뀌어 교통사고를 당하는 경우가 있다. 특히 주변이 어둡고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이 적은 야간이 위험하다”고 말했다.

지난 16일 서울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일부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고 있다. 임선영 기자

지난 16일 서울시청 앞 횡단보도에서 일부 시민들이 스마트폰을 보면서 걷고 있다. 임선영 기자

3개월간 효과 분석해 표준 규격 마련  

바닥 신호등 LED 조명의 표면은 방수처리 돼 있고, 강화 플라스틱으로 덮여있다. 따라서 비가 오거나 사람들이 밟고 지나가도 문제가 없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하지만 해가 지기 전의 밝기가 기존 보행자 신호등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경찰은 이번 시범 운영 과정에서 관련 기술을 보완한다는 계획이다. 또 신호등의 길이, 설치 위치 등도 다양하게 시도해 표준 규격을 마련할 예정이다.

동대구역 환승센터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시민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경찰청]

동대구역 환승센터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서 시민들이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다. [사진 경찰청]

몇 년 전 일부 지자체에서 노약자의 보행을 돕기 위해 바닥 신호등을 설치한 적이 있다. 하지만 경찰의 허가를 받지 않은 교통시설물이어서 제재 대상이었다. “시야를 바닥으로 빼앗아 오히려 위험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또 바닥 신호등이 고장이라도 나면 기존 신호 체계를 어지럽힐 위험도 있었다. 일반 신호등에 신호 정보를 보내는 제어기에 바로 연결해서였다. 도로교통공단 관계자는 “경찰이 도입하려는 바닥 신호등은 일반 신호등 제어기에 장착된 별도의 기기(옵션보드)에 연결해 신호 정보를 받는다. 따라서 기존 신호 체계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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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와이에선 스마트폰 보면서 걸으면 벌금 10만원

독일·싱가포르 등도 스몸비 안전사고 예방을 위해 바닥 신호등을 설치했다. 중국 충칭에는 스마트폰 사용자를 위한 전용 보행로가 있다. 한 도로를 일반 보행자의 길과 스마트폰 보행자의 길로 나눠 서로 부딪히지 않게 했다. 미국 하와이주 호놀룰루시는 스마트폰을 사용하는 보행자에게 최대 99달러(약10만 6000원) 벌금을 물린다. 국내에선 서울시가 서울시청 앞 등의 바닥에 ‘스마트폰 사용 자제’를 알리는 표지판을 설치했지만,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중국 충칭에 있는 스마트폰 사용자 전용 보행로.[중앙포토]

중국 충칭에 있는 스마트폰 사용자 전용 보행로.[중앙포토]

고준호 한양대 도시대학원 교수는 “한 사람이 교통사고를 당하면 발생하는 사회적 손실과 비용은 엄청나다. 스몸비 안전사고는 더이상 방치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다. 한 사람의 소중한 생명이라도 구하고자 하는 ‘사회적 실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저 ‘사용하지 말라’ ‘위험하다’는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행 환경을 개선하는 노력이 바람직하고 현실적”이라고 덧붙였다.

임선영 기자 youngc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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