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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지진 피해로 수능 연기된 포항지역 고교들 가봤더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규모 5.4의 경북 포항 지진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의 전격 연기 사태로 이어진 데는 포항 지역 학교 건물 안전 문제가 제기된 때문이다. 특히 안전을 우려한 학부모와 학생들이 청와대에 집단으로 수능 연기 청원을 하면서 연기 방침 발표로 이어졌다.

규모 5.4 지진에 무너지고 금 간 학교 벽면 #수험생 불안감 조성할까 종이로 가려놓기도 #"그냥 수능 강행했다면 향후 문제 생겼을 것"

시험장으로 지정된 포항지역 학교들은 지진 피해에도 다음날 치러질 수능 준비를 마친 상태였지만, 갑자기 수능이 미뤄지면서 일주일 뒤 다시 수험생을 맞게 됐다.

이날 오후 9시10분쯤 찾은 경북 포항시 북구 대동고등학교는 본관 건물과 식당이 있는 별관 건물 모두 외벽 벽돌들이 떨어진 모습이 멀리서도 보였다.

가까이 가니 떨어진 빨간 벽돌들 무더기로 산산조각 나 있고 주변으로는 다가가지 못하도록 테이프를 쳐 놓은 모습이었다. 만약 지진 당시 그 아래 사람이 서 있었다면 큰 부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으로 보였다.

학교 안에는 교장과 교감, 교무부장 등 교사들이 컵라면을 먹으며 긴급 대책 회의를 진행 중이었다. 수능이 치러질 예정이었던 2~3층 고사장 안에는 벽에 2m 넘게 금 간 곳도 있었다. 복도에도 갈라진 곳 투성이였다. 성한 교실이 없었다.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이날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벽면에 금이 간 모습. 포항=김정석기자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이날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벽면에 금이 간 모습. 포항=김정석기자

이 학교 김문관(59) 교감은 "교육부의 수능 연기 조치는 정말 잘 된 것이다. 포항지역 다수 수험생들이 불안해 집에 못 들어가고 있는 상황"이라며 "이대로 수능이 치러졌다면 향후 공정성 문제도 제기될 수 있고 수능 중 여진이 발생한다면 혼란이 얼마나 클지 상상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같은 시각 포항시 북구 포항고도 본관 정문에 '포항지구 제1시험장'이라는 안내문과 수험생 주의사항이 붙어 있는 모습이었다. 각 교실마다 수험장 번호가 붙어 있었다. 지진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상적으로 수능이 치러질 터였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니 복도와 교실 벽면에 종이조각을 길게 붙여둔 모습이 곳곳에서 눈에 띄었다. 지진으로 시멘트 벽에 금이 가자 이를 가리기 위해 종이조각을 붙여두면서다.

15일 지진이 난 경북 포항시 북구 학산동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금이 가 학교 측이 종이로 이를 가려둔 모습. 포항=김정석기자

15일 지진이 난 경북 포항시 북구 학산동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금이 가 학교 측이 종이로 이를 가려둔 모습. 포항=김정석기자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이날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벽면에 금이 간 모습. 수능 수험생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종이를 금 위에 붙여두는 조치를 했다. 포항=김정석기자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복도에 이날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벽면에 금이 간 모습. 수능 수험생들이 불안하지 않도록 종이를 금 위에 붙여두는 조치를 했다. 포항=김정석기자

포항고 관계자는 "수능을 치는 수험생들이 학교 벽면에 금이 가 있는 모습을 보면 불안감을 느낄까봐 종이로 가려뒀다"고 설명했다. 미처 종이로 가리지 못한 벽면에는 틈이 0.5cm 정도 벌어진 금이 선명하게 보였다.

같은 시각 포항시 북구 학산동 포항여고 1층 교무실은 불이 환했다. 교장을 비롯한 교사 수십 명이 수능 연기 대책을 짜느라 분주했다.

이 학교 관계자는 "학교 체육관에서 수험표를 나눠줄 때 지진이 와 일부 학생이 경련을 일으키거나 쓰러졌다"며 "수능이 연기된 것은 고사장 시설 문제보다 학생들의 심리 상태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지난해 경주 강진 때는 밤이라 학생들이 심하게 동요해 구급차까지 왔었다"며 "여진이 올 것을 생각하면 연기하길 잘했다"고 덧붙였다.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본관 정문에 16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수능 안내문이 붙어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15일 경북 포항시 북구 포항고등학교 본관 정문에 16일 치러질 예정이었던 수능 안내문이 붙어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이 학교는 교실 한 동의 복도 벽 두세 곳에 2m 길이의 금이 가거나 천장 에어컨 바람막이가 떨어지는 피해를 입었다.

부모님을 기다리던 수능 수험생 김모(18)양은 "내일이면 시험이 끝날 줄 알았는데 연기돼 마음이 불편하지만 이렇게 불안한 심리 상태로 도저히 내일 시험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포항여고 과학실에선 실험용 포름알데히르 일부가 지진 진동으로 떨어져 깨지면서 누출됐다. 포름알데히르는 독성을 지닌 유해화학물질이다. 경북소방본부 119특수구조단이 출동해 수습 작업을 했다.

15일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포항여고 과학실의 실험용 포름알데히르가 누출돼 경북소방본부 119특수구조단이 수습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경북소방본부]

15일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5.4 규모 지진으로 포항여고 과학실의 실험용 포름알데히르가 누출돼 경북소방본부 119특수구조단이 수습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 경북소방본부]

유성여고도 큰 피해를 입었다. 1층 교무실, 교실, 복도 곳곳에 2m 정도 금이 생겼고 천장이 일부 무너져 내렸다. 본관 옆 강당 건물도 피해를 입었다. 5m 높이의 천장에서 부자재가 떨어져 내렸다. 수능 하루 전이어서 학생들이 일찍 하교해 인명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이날 오후 예비소집일을 맞아 운동장에 모인 학생들과 학부모들은 불안해 했다. 학교 관계자는 “교실 피해는 크지 않지만 수험생들의 심리적 영향 등을 고려해 오후에 교육청에 수능 연기를 요청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포항교육지원청은 16~17일 이틀간 유치원과 초·중·고 휴업을 결정했다.

앞서 지진 발생 뒤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수능 연기'를 요청하는 글이 쇄도했다. 오후 8시 기준 20여 개의 글이 올라왔다. 자신을 포항에 사는 수험생이라고 밝힌 한 청원인은 "포항 학생인데 불안해서 미칠 것 같습니다. 수능 딱 하루만 연기해주세요"라고 적었다.

또 다른 청원인은 "수능 당일 여진이 걱정돼 기사를 찾아보니 '미약한 지진일 경우 답안지를 뒤집고 대피했다가 괜찮아지면 지연된 시간만큼 시험이 재개된다'는 내용이 있었다. 그 기사를 보고 우리 사회는 수능시험의 답안지를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긴다는 걸 느꼈다. 수능시험이 인생에서 중요한 시험이긴 하지만 그 가치는 사람의 목숨에 비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수험생들이 모인 온라인 카페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도 수능 연기 관련 글이 계속 올라왔다.

한 수험생은 "수능은 집중력 싸움인데 불안한 상태에서 시험을 잘 볼 수 있을지 걱정이 된다"고 털어놨다. 다른 네티즌은 "그냥 수능을 연기해라. 세월호 1만 배 피해보기 싫으면"(sams****)라고 주장했다.

포항=최은경·김정석·송우영·최규진 기자, 서울=홍상지 기자  choi.eunky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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