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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R1400’의 눈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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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종윤 기자 중앙일보 편집국장
김종윤 경제부장

김종윤 경제부장

1977년 고리 1호기부터 시작해 89년까지 국내에서 8기의 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됐다. 자체 기술이 아니었다. 미국 웨스팅하우스와 캐나다 캔두의 작품이었다. 원전 설계와 건설은 지금도 그렇고, 당시도 첨단 기술이다.

신고리 5, 6호기 공론조사, 원전 포기로 읽히면 안 돼 #세계시장 뚫은 토종 원전 기술에 대한 청사진 마련해야

웨스팅하우스나 캔두는 한국에 기술 이전을 해줄 생각이 없었다. 한국 엔지니어가 원자로의 설계 도면을 베끼면서 기술을 익히는 데 심혈을 기울이면 “당신이 무얼 알겠느냐”며 무시하기 일쑤였다.

지성이면 감천이었다. 기술력은 있지만 시장에서 웨스팅하우스에 밀리던 컴버스천엔지니어링이라는 회사를 알게 됐다. 한전은 기술 이전을 조건으로 영광 3, 4호기 건설을 의뢰했다. 한국의 원전기술 개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엔지니어들은 현장 야전침대에서 밤을 새워 가며 기술을 익혔다. 기술자립도가 95%까지 올라갔다. 기술 전수만 받는 데 그치지 않았다. 더 심화시켰다. 2005년 한국표준형원전인 ‘OPR(Optimized Power Reactor)1000’이 탄생했다. 설비용량 1000메가와트(㎿), 설계수명 40년, 내진설계 0.2g(리히터 규모 약 6.5)의 토종 원전이다. 고리·월성·한빛·한울 원전에 총 10기를 운용 중이다.

새 정부가 건설을 잠정 중단하고 공론조사를 통해 운명을 정하겠다고 한 신고리 5, 6호기는 ‘APR(Advanced Power Reactor)1400’이라는 3세대 원전을 적용했다. OPR1000을 진화시켜 안전성과 효율성을 높인 모델이다. 설비용량 1400㎿, 설계수명 60년, 내진설계 0.3g(리히터 규모 약 7.0) 규모다.

한전은 APR1400으로 2009년 12월 일을 냈다. 아랍에미리트(UAE)에서 총 186억 달러(약 21조원) 규모의 원전 4기를 수주했다. 국제 공개입찰 방식에서 프랑스·일본 등 원전 강국을 눌렀다. 이 액수는 당시 기준으로 현대자동차 쏘나타 100만 대, 또는 30만t급 초대형 유조선 180척 수출과 맞먹는 규모다. 국내에서도 이미 완공한 신고리 3호기와 공정률이 90% 이상인 신고리 4호기, 신한울 1, 2호기가 APR1400 원전이다.

탈(脫)원전은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이었다. 원자력을 줄이고 친환경·신재생 에너지 중심으로 발전 정책을 전환하자는 걸 반대할 사람은 없다. 다만 그 길을 가려면 수요자인 국민이 비싼 전기요금을 감당해야 한다. 못할 것도 없다. 원전의 폐로(廢爐) 및 환경 비용을 따지면 원자력 발전의 총 사회적 비용도 만만찮다는 분석까지 나오는 마당에 전기요금 못 올릴 바 아니다. 한국의 전기요금은 원전과 석탄화력 발전 덕에 주요 국가와 비교해 상대적으로 싸다. 전기 과소비의 원인이기도 하다.

고민해야 할 것은 원전 기술이다. 한국은 미국·프랑스·러시아·캐나다에 이은 다섯 번째 원전 수출국이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학자·엔지니어는 물론이고 세금으로 뒷받침한 국민이 땀 흘려 이룩한 성과다.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형의 자산이다. 이젠 미국·프랑스 등에서 일부 우리 기술을 역수입할 정도다.

이런 한국이 원전 건설을 중단한다면서 다른 나라에 원전을 수출하겠다고 나설 수 있나. 결국 국내 인력과 기술이 외국으로 유출될 것이다. 원전 산업이 무너지는 공식이다. 한국은 일자리 부족, 미래 먹거리 부족에 고민하는 나라다. 더 성장의 파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다. 그래야 제대로 나눌 수 있다.

한국의 기술진은 이미 APR1400의 성능을 향상시킨 APR+를 개발 완료했다. 4세대 원전인 ‘IPower(Innovative Power)’ 개발에도 착수했다.

신고리 5, 6호기의 운명을 결정할 공론화위원회와 시민배심원단이 곧 구성된다. 한국 원전기술의 운명도 이들 손에 달려 있다. APR1400이 눈물 흘리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세계시장에 우뚝 선 우리의 원전기술이 사장돼선 안 된다. 미래 청사진까지 함께 그릴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나와야 한다.

김종윤 경제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