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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위기 모면에 급급해선 대우조선 못 살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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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문희철 기자 중앙일보 기자
문희철 산업부 기자

문희철
산업부 기자

“양치기 소년이 된 것 같다.”

정성립 대우조선해양 사장은 지난 24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이솝우화를 인용하며 심경을 토로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양치기 소년은 대우조선해양이 아니라 정부다. 지난해 10월 대우조선해양에 4조2000억원 지원을 결정한 것도, ‘추가 지원은 없다’고 밝힌 것도 정부였다.

결과야 어떻든 정부가 양치기 소년처럼 심심풀이로 거짓말을 했을 리 없다. 5만여 명의 일자리와 1300여 개 상거래·협력업체, 거제 지역 경제까지 고려한 정책적 판단의 결과였다.

실제 정부가 발표한 ‘대우조선 구조조정 추진방안’을 뜯어보면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 보려는 노력의 흔적이 보인다. 정부는 다섯 페이지에 걸쳐 ▶법정관리 ▶기업분할 ▶워크아웃 ▶유동성 지원 등 대안을 비교·분석하며 ‘추가지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논리적으로 도출했다.

하지만 정부안에는 근본적인 질문과 답이 빠졌다. 대우조선해양의 미래 경쟁력에 대한 궁금증이다. 양치기를 믿고 또 한 번 혈세를 투입하면 대우조선해양은 중국 조선업과 차별화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첨단기업으로 바뀌는 걸까. 조선업 혁신을 이끌 수 있는 선도 기업으로 탈바꿈해 미래 대한민국을 먹여살릴 것인가.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정부안을 보면 애당초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게 불가능하다. ‘지금만 넘기면 곧 업황이 좋아질 것’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조선업 기술력은 지금도 최고인데 단지 방만경영과 일시적 유동성이 문제라는 식이다.

실제로 정부안은 클라크슨리서치의 자료를 토대로 ‘선박 발주량이 2016년부터 개선되고, 대형 컨테이너선 분야는 큰 폭으로 회복된다’는 낙관론만 적시했다. 2015년 대우조선 지원 당시 인용했던 자료와 똑같은 내용을 업데이트한 수준이다.

조선업계 전망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혼재한다. 입맛에 맞는 편향적인 자료만 보여주는 건 반칙이다. 조선사가 배를 건조할 때 원가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강재의 t당 가격이 1년 만에 22% 상승 했다. 선박 건조 비용은 커지고 있지만 선박 가격은 반대로 하락세다. 조선·해운 전문지 트레이드윈즈에 따르면 올해 초 노르웨이 DHT로부터 현대중공업이 수주한 초대형원유운반선(VLCC) 수주금액은 14년 만에 최저였다. 정부안은 이문 남기기가 갈수록 어려워지는 조선업 실상부터 인정했어야 했다.

물론 정부안엔 방향성이 있다. 당장 돌아올 만기 채권 상환이라는 ‘늑대’를 피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오늘 되돌아간 늑대는 내일 다시 올 수도 있다. 튼튼한 울타리를 만들어 둬야만 늑대가 나타나도 걱정이 없다는 사실을 아직도 정부는 모르는 것 같다.

문희철 산업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