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문재인, 박 대통령 퇴진 뒤 거취 정할 권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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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가 연일 박근혜 대통령의 ‘명예로운 퇴진’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21일 대구에서 “대통령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도록 퇴로를 열어주고 돕는 것이 국민이 대통령에게 해야 할 하나의 예우”라고 했다. 문 전 대표는 앞서 20일 야권 핵심 정치인 회동에서도 “박 대통령이 스스로 퇴진을 선언하면 명예롭게 퇴진할 수 있게 협력하겠다”고 했다.

문 전 대표는 야권 1위 대선 주자다운 관용적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이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른다. 그러나 국민 입장에선 법을 무시하고 민심에도 역행하는 오만한 발상으로 여겨질 뿐이다. 법적으로는 일개 정당의 평당원에 불과한 그에게 누가 전대미문의 국정 농단 혐의자를 사면할 권한을 줬는가. 같은 당 김부겸 의원조차 “민심을 제대로 읽지 못한 너무 성급한 발언”이라 비판하고 있다. 문 전 대표가 벌써 대통령에 당선된 것처럼 착각해서 그랬다면 더더욱 문제다. 대통령의 사면권은 실형이 확정된 사람에게만 미친다. 박 대통령은 드러난 혐의만 봐도 퇴진 뒤 구속기소될 가능성이 크다. 이럴 경우 최종 판결이 나오기 전까지는 문 전 대표가 대통령이 되더라도 어떤 조치도 할 수 없다.

이를 모를 리 없는 문 전 대표가 이런 발언을 한 배경은 박 대통령을 속히 하야시켜 60일 이내에 대선이 치러지도록 하는 게 수권에 유리하다는 계산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민주당이 박 대통령 탄핵을 당론으로 정해놓고도 실행을 주저하고, 책임총리 추천 대신 ‘황교안 총리 탄핵’ 같은 비현실적 주장을 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탄핵이나 거국내각이 실현되면 이른바 ‘제3지대’가 넓어져 수권 가능성이 작아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국가원수로서 도덕성과 정당성을 모두 상실한 박 대통령의 퇴진은 민심의 당연한 요구다. 문 전 대표도 그런 요구를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퇴진 뒤 거취까지 정할 권한은 없다. 문 전 대표와 민주당이 정말 나라를 걱정한다면 속 보이는 ‘명예로운 퇴진’ 주장 대신 거국내각 구성과 탄핵을 사심 없이 추진해 박 대통령의 ‘질서 있는 퇴진’을 끌어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