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존 배낭’ 챙겨 놓고, 진동 감지 앱 내려받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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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에 사는 황모(30)씨는 지난 19일 지진 발생 직후 인터넷 사이트에서 비상시에 덮을 수 있는 보온 담요를 7000원에 구입했다. 시중에서 10만원대에 파는 생존 배낭도 직접 만들었다. 이 배낭 안에는 1.8L 생수 한 통과 손전등·통조림·라디오·침낭 등 구호품이 들어 있다. 황씨는 “큰 지진이 발생하면 배낭을 메고 가족들과 미리 확인한 대피소로 갈 계획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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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 창원시에 사는 황모(30)씨가 지난 19일 지진 후 직접 만든 생존 배낭과 내용물. [사진 강승우 기자]

대전시의 주부 이영현(33)씨는 요즘 아파트 창밖으로 비행기나 차 소리가 조금만 크게 나도 ‘지진이 아닌가’ 싶어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사흘 전에는 이 ‘지진공포증’을 극복하고자 빈 페트병에 물을 담아 거실에 뒀다. 이씨는 “마음이 불안할 때 페트병 안에 담긴 잔잔한 물을 보면 도움이 된다는 인터넷 글이 있어 따라 해봤다”고 말했다.

한반도 전역 강타한 지진공포증
구토·소화불량·불면증 등 트라우마
19층 주민, 자녀 안고 계단 대피 연습
“심리치료 지원, 대응 매뉴얼 보급을”

한국 사회가 지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지난 12일 경북 경주시에서 규모 5.8의 지진이 발생하고 1주일 새 여진은 400회 이상 이어졌다. 예상치 못한 지진 사태로 ‘한반도는 지진 안전지대’라는 믿음이 깨졌다. 유치원과 어린이집에서는 부랴부랴 지진 대피 교육을 시작했고,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려고 했던 학교 중 상당수는 여행을 취소하고 있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는 두 차례의 지진에 제 기능을 못한 정부의 재난경보시스템을 향한 비난과 함께 ‘보름달이 뜨면 대지진이 온다’ ‘다음 지진은 더 크다’ 등의 근거 없는 주장들이 떠돌고 있다.

지진을 경험한 사람들은 후유증을 겪고 있다. 추석 연휴 동안 경주의 지진 피해 주민들을 찾아가 심리치료를 한 김성삼 대구한의대 상담심리학과 교수는 “주민들이 겪는 고통이 생각보다 심각한 수준이었다. 60대 이상 노인 여성들은 50% 이상이 소화불량과 불면증 등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이 겪는 증상은 불안감을 동반한 구토증·호흡곤란·불면증·빈뇨 등이다. 김 교수는 21일 오후 경주에 있는 각 병원의 의사들과 ‘지진 트라우마 치료 매뉴얼’에 대해 의논할 계획이다.

일부 시민은 ‘생존 훈련’을 하고 있다. 울산시 남구의 아파트 19층에 사는 조모(34)씨는 19일과 20일 생후 6개월 된 자녀를 안고 1~19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렸다. 지진이 났을 때 얼마나 빨리 내려갈 수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조씨는 “19층에서 1층까지 가는 데 6분 정도 걸렸다.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연습해 보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휴대전화 주위에서 발생하는 진동의 강도를 측정해 특정 규모 이상의 진동이 발생하면 알람을 울리는 ‘지진계’ 애플리케이션(앱)도 인기다. 회사원 김모(36)씨는 “국민안전처에서 매번 늦장 대응을 하니 오히려 이 앱에 더 믿음이 간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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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에서는 한 개발자가 텔레그램 메신저로 지진 알람을 받을 수 있는 ‘지진희알림’ 서비스를 공개해 화제가 됐다. 이 개발자는 지진이 나면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게시판 중 배우 지진희 갤러리에 집중적으로 글이 올라온다는 사실에 착안해 지진희 갤러리에 올라오는 글이 분당 20개 이상일 때 지진 알람이 울리도록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이은희 경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정부와 지자체가 지진 피해 지역 주민들에 대한 심리치료를 지원하면서 일반 국민들에게 잘 정리된 대응 매뉴얼을 보급해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대전·울산·인천·부산=김방현·위성욱·최모란·강승우 기자,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사진=강승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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