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추적] “증인을 죄인 취급하는 청문회 바꾸고, 국감과 중복 해소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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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일본군 위안소에 끌려가 매일 일본군 4, 5명에게 강간당하며 개·돼지보다 못한 취급을 받았다.”

2007년 2월 15일 미국 하원 외교위원회 아시아·태평양소위. 이용수 할머니가 첫 ‘일본군 위안부 청문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5개월 후 미 하원은 “일본 정부는 위안부 강제 동원에 대해 공식 사과하고 역사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종군위안부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미국, 정책현안·증언 듣는 게 핵심
행정부 견제, 의회정치 활성화 기능
청와대·정부 “국정 마비 초래할 것”
경제계 “매일 청문회 나오게 되나”

지난 22일 조진혜 재미탈북민연대 대표도 하원 국제기구소위의 청문회에서 탈북 여성들이 중국에서 겪고 있는 인신매매 실태를 증언하는 등 미국 의회에선 크고 작은 청문회가 매일 한두 개씩은 열린다. 청문회(Hearing)라는 말처럼 듣는 게 핵심인 자리다. 미국처럼 상임위·소위원회가 각종 현안조사 청문회를 열 수 있게 하는 내용의 국회법 개정안을 23일 정의화 국회의장이 정부로 이송했다.

과연 한국에서도 미 의회와 같은 청문회 운용이 가능할까. 당장 청와대와 정부는 “기존 국정감사·국정조사에 더해 ‘365일 청문회법’까지 도입할 경우 국정 마비를 초래할 것”이라고 반발하고 있다. 여야 국회의원들이 국정조사에 합의해 청문회를 열거나 국정감사를 실시할 때 보여준 모습이 근거다. 실제로 매년 국정감사 때는 상임위별로 100여 명씩 증인으로 하루 종일 불러 놓고 질의는 5분으로 끝내는 의원들의 ‘갑질’ 행태가 되풀이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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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산하기관을 대상으로 하는 국정감사임에도 민간인 증인도 무더기로 채택되곤 했다. 익명을 원한 대기업 임원은 “국정감사 증인 채택 때문에 매년 골머리를 앓았는데 이제 연중 청문회 증인·참고인으로도 불려 나와야 하느냐. 어디 외국이라도 나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미국 의회에 일상화돼 있는 청문회가 행정부를 견제하고 정부 정책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수단임은 틀림없다. 입법·인사청문회 외에 가스값 폭등 같은 정책 현안을 질의하는 감독청문회, 워터게이트 청문회처럼 고위공직자와 정부부처 비리를 조사하는 조사청문회처럼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한국 국회가 국정감사 때 보여주는 모습과는 다르다. 2014년 국회개혁자문위원을 지낸 황정근 변호사는 “(상시 청문회 제도를 도입하려면) 증인·참고인을 불러낸 후 마치 죄인처럼 호통치 는 우리 청문회 관행부터 바뀌어야 한다”며 “이런 관행을 이유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옳다고 볼 수는 없지만 행정부 입장에선 업무 차질을 우려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서정건 경희대 정치외교학과(미국정치) 교수는 “청문회 제도는 미국 의회가 대통령 견제장치로 발전시킨 제도이긴 하지만 의회 중심 정치를 활성화한다는 긍정적 기능이 많다”며 “한국도 그런 식으로 운용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상시 청문회와 기존 국정감사·국정조사와의 중복 문제도 해소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내각제인 영국·일본은 청문회 대신 총리와 장관(대신)들이 의회에 출석해 답변하는 대정부 질문 제도만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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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국무총리와 장관들이 임시회·정기회마다 대정부 질문에 답변하는 것은 물론 매년 9월 정부부처와 산하기관에 대한 국정감사 제도도 갖고 있다. 제헌헌법 때부터 대통령제와 내각제의 정부 견제장치를 모두 도입했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다시 상시 청문회 기능을 더하게 된 상황이다.

서 교수는 “ 상시 청문회 제도 도입을 계기로 국정감사·국정조사 기능을 보완·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효식·최선욱·안효성 기자 jjpo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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