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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플릿 보트’가 정치혁명 이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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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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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정
지역뉴스부장

4·13 총선이 끝난 지 열흘이 지났지만 파장과 여운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역대 어떤 선거보다 정치 지형에 메가톤급 변화를 일으켰기 때문일 것이다. 위(魏)·촉(蜀)·오(吳)의 삼국정립(三國鼎立) 구도를 연상케 하는 새로운 판이 형성됐다. 기대와 우려가 혼재하고 있다. 하지만 대립·반목·갈등이 아닌 대화·타협·절충의 선진 민주주의로 가는 황금분할로 살려야 한다.

새로운 정치 지형을 만들어낸 핵심 요인은 유권자의 교차투표였다. 교차투표는 흔히 ‘크로스 보트(Cross vote)’라고 부른다. 그런데 코리아중앙데일리의 영어 전문가에 따르면 크로스 보트의 본래 의미는 다르다. 대통령은 A정당 후보를 뽑고 국회의원은 B정당 후보를 뽑는 방식이 크로스 보트다. 지역구는 A정당 후보를 찍고 비례대표는 B정당을 찍는 행위를 정확히 표현하면 ‘스플릿 보트(Split vote·분할투표)’라고 한다. 20대 총선에서 절묘하게 판을 바꾼 유권자의 투표 행위는 스플릿 보트란 얘기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권자의 스플릿 보트를 어떤 선거 전문가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선거 막판에 유권자의 스플릿 보트를 자극한 요인은 무엇일까. 두 가지 사건을 꼽는다면 첫째는 진경준 검사장의 120억원 넥슨 주식 대박 의혹 사건이다. 현직 검찰 고위 간부가 막대한 시세 차익을 올렸다는 의혹이 제기됐는데도 청와대·정부·여당의 초기 대응은 실망스러울 정도로 미온적이었다. 감싼다는 오해까지 주면서 샐러리맨과 중산층 유권자까지 허탈하고 분노하게 했다.

중국 닝보(寧波)의 북한 류경식당 종업원 13명의 집단 탈출 및 입국 사건도 막판 표심에 영향을 준 또 다른 변수였다. 탈북자 신변 보호를 이유로 정부가 고집해온 비공개 원칙을 스스로 깨고 선거 직전 입국한 바로 다음 날 언론에 발표했다. 정보기관의 공작 냄새도 풍겼다. 적잖은 유권자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시대착오적인 북풍(北風) 공작 같은 꼼수로 유권자의 선택에 방해전파를 쏘느냐”고 질타했다. 선거 막판에 보여준 이런 비정상적인 행태들이 가뜩이나 누적된 정부와 여당에 대한 불만을 자극했고 ‘선거 탄핵’이라 불릴 정도의 ‘응징 투표’로 이어졌다고 본다.

이번 선거에서 유권자들은 지역주의라는 괴물 같은 철옹성에도 구멍을 숭숭 뚫었다. 김부겸·이정현·김영춘·정운천 등 시시포스(Sisyphos)처럼 포기하지 않고 지역주의에 도전한 선거 영웅들을 대거 배출됐다. 하지만 지역주의의 마법에서 완전히 깨어나기에는 아직 부족하다. 갈 길이 많이 남아 있다. 지역주의에 기생해온 정당과 정치인을 기계적으로 찍어주는 후진적 ‘관성 투표’ 행태에서 완전히 벗어나 진정한 유권자 혁명을 완성해야 한다. 스플릿 보트는 다음 선거에서도 정치를 바꿀 비장의 카드다.

장세정 지역뉴스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