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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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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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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 대우

4·13 총선은 무서운 성적표를 남겼다. 요즘 3당의 모습을 보면 고교 시절 오금 저리던 순간이 떠오른다.

성적표를 받은 엄친아 새누리는 눈을 의심한다. 뚫어져라 쳐다봐도 2라는 숫자는 그대로다. “반장이 웬일로 2등이래….” 웅성거리는 아이들. 위로받고 싶지도 않다. 숫자를 위조해서라도 분명히 잘못된 성적표를 바로잡고 싶다.

공부량에 비해 점수가 잘 나온 더민주. 애써 참아 보지만 히죽히죽 웃음이 새어 나온다. 박수를 받으면서 얼어붙은 엄친아를 슬쩍 쳐다본다. 1등까지 할 줄이야. 조금 어색하다. 하지만 성적표에 분명히 적혀 있지 않은가. ‘다음 시험에도 1등을 해야 진짠데…’. 걱정이 스쳐 간다.

전학 온 국민이는 첫 시험에서 3등이다. 이전 학교에서 공부 좀 했다더니 역시 다크호스다. 게다가 수학에서 혼자 100점이다. 다른 과목 성적은 별 볼일 없지만 벌써 수학을 잡았다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가볍게 비유를 하긴 했지만 선거가 끝난 뒤에 방송사도 정당과 상황이 다르지 않다. 역량을 집중한 선거방송에 대한 성적표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상파 3사는 출구조사부터 평가를 받는다. 60억원이 넘는 조사 비용은 사실상 시청자와 국민에게서 나온 것이기에 예측이 틀렸을 때의 부담은 크다. 이번에 3사는 의석수 예측을 자화자찬하고 있다. 오차 범위가 두 자릿수에 달하는 수치를 내놨지만 새누리당의 과반 붕괴를 예측했다는 것이다. 정답은 새누리당 122석이었는데 MBC(118~136석), KBS(121~143석), SBS(123~147석) 순으로 근사치를 내놨다.

3사의 휘황찬란한 그래픽과 무대장치에 대한 평가도 나온다. 이번에도 ‘억 소리’ 나는 비용이 투입된 로봇쇼와 대하사극이 등장했다. 재미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선거방송이 예능이냐는 비판도 나온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를 떠들썩하게 치르는 것에 문제 제기를 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아쉬운 건, 언제부터인가 꽃의 향기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선거에 담긴 민심이 무엇인지에는 너무 소홀하다. 민주주의 꽃은 기계가 만든 조화로 전락했고, 방송사들은 오로지 1등을 위해 달리는 경주마 같다.

이번 선거방송에서 JTBC는 새로운 소통 방법을 찾기 위한 시도를 했다. 한국 최초로 페이스북 라이브로 이원 생방송을 했다. 앵커가 스튜디오 밖으로 나와 시청자와 대화를 하고, 댓글로 소통했다. 참신한 시도에 적지 않은 박수를 받았는데, 그중 가장 놀라운 것은 바로 시청자 또는 페이스북 이용자들의 댓글이다. 1만8000여 개의 댓글이 붙었다. 한 개를 읽는 데 2초만 잡아도 10시간이 걸리는 분량이다. 우리 방송이 1등을 향해 내달리는 동안 시청자들은 뭔가 말을 걸어주기를 기다렸던 것은 아닐까. 1만8000개의 댓글은 시청자들이 미디어에 남긴 무거운 성적표다.

김승현 JTBC 정치부 차장 대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