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노트북을 열며

“두 번 횡재는 없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기사 이미지

정용환
JTBC 정치1부 차장

수도권에서 낙선한 새누리당 초선 의원방. 형광등 한 개만 켠 채 막내급 비서관이 박스에 이것저것 담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데 불 다 켜놓고 일 하자니 정신만 사나워서….” 불과 몇 달 전 낙승을 점치며 보좌진과 인턴, 입법 보조원까지 10여 명이 북적댔던 방 분위기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반면 여야를 가릴 것 없이 수성에 성공한 의원방에는 축하난이 넘쳐 방문객에게 분양한다고 떠들썩했다.

승패의 극명한 엇갈림은 새누리당 보좌진 집단에 구조조정이라는 후폭풍을 몰고 왔다. 여소야대로 변한 새누리당 형편상 250~300명의 보좌진이 새 일자리를 찾아 떠나야 한다.

총선 이후 만난 정계·학계 원로는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대화 속에는 낭패감이 물씬 풍겼다. ‘완장 공천’ ‘옥새 파동’ ‘윤상현 막말 파문’ 등 여당의 오만 방자한 속내가 잇따라 드러나면서 보수층이 낯색을 바꾼 건 맞지만 이 정도 충격파를 줄지는 몰랐다는 것이다.

더불어민주당은 전체 지역구 의석 중 거의 절반에 달하는 수도권에서 70% 가까운 의석을 쓸어 담았다. 정당득표율 3위의 성적으로 원내 제1당이 됐다. 여권의 자중지란으로 횡재를 했다는 평이 우세하다. 사정이 이런데도 승리감에 도취돼 아전인수격 공치사가 분출하고 선거 끝나자마자 대선 잠룡들이 움직이고 당권을 둘러싼 신경전 얘기가 나오는 것은 민심에 반하는 일이다.

거대 양당 심판론의 최대 수혜자인 국민의당과 안철수 공동대표는 달콤한 한 주를 보냈다. 이제 호남과 중도, 보수가 알록달록 결합한 국민의당 앞에는 양날의 칼이라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다. 소나기를 피해 처마 밑에 잠시 모여든 세 사람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권 8년을 조사하기 위해 청문회를 열자던 천정배 공동대표. “당이 완장 찬 듯 행동해선 안 된다”는 반발에 부딪쳐 한 발 물러서긴 했지만 주체할 수 없는 힘에 취해 좌충우돌하고 있는 신생 정당의 현주소를 보여준다. 비가 그치면 세 사람이 갈 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질지, 아니면 계층과 지역을 상징하는 세 사람이 몸집을 불릴 것인지는 안 대표에게 달렸다.

심상정 정의당 대표는 “내년 대선을 새누리당이 이번 총선처럼 치를 것이란 가정은 비현실적”이라고 선을 긋는다. 냉정하게 얘기해서 상대의 헛발질로 야권이 두 번 연속 횡재할 가능성은 없다는 말이다.

20년 전 총선에서 대승을 거둔 신한국당에서 이른바 대선 후보 9룡이 쏟아졌다. 방심한 여권의 틈을 파고들어 충청 세력과 손잡은 DJ가 이듬해 대권을 가져갔다. 이번 총선의 참패가 여당에 예방주사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

여권이 제대로 심판을 받았지만 이제는 야당들도 수권정당으로서 자격을 갖추고 있는지 보여줘야 하는 시험대에 올랐다. 다행히 경제회생을 위해 야권이 화답한 것은 긍정적인 신호다. 유권자에겐 내년 말 대선 후 누가 형광등 하나 켜진 방에서 짐을 쌀지 가늠하기 어려울수록 좋은 일이니까.

정용환 JTBC 정치1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