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중립”이라 쓰면 “팔라”로 읽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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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직전에 쓴 보고서에 언급했어요. 뒤쪽에….”

 그리스 리스크로 코스피가 3일 째 하락 중이던 지난 8일, 한 애널리스트는 이렇게 말했다. “성장주에서 대형 가치주로 방향을 바꾸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보고 전화를 걸어 “시장에선 2분기 기업 실적이 부진할 거라고 전망하는데 대형 가치주가 상승하겠느냐”고 물었다. “주식 투자를 계속한다는 전제 아래 권하는 전략”이라는 답에 “시장이 좋지 않으면 주식 투자 자체를 하지 말아야 하는 거 아니냐”고 재차 물은 참이었다. 그의 말대로 직전 보고서 맨 끝엔 “그리스 악재가 충분히 반영되면 재진입 기회를 탐색하라”고 쓰여 있었다.

 애널리스트의 보고서를 해독하는 건 재테크 기자가 풀어야 할 과제다. 기업 눈치 보느라 매도 보고서도 못쓰는 상황이다 보니 암호 같은 보고서가 널렸다. 특히 미묘한 사안을 다룰 땐 난수표 같은 내용이 넘쳐난다. “중립이라 쓰고 매도라고 읽는다”는 말은 여의도에서 불문율이 된 지 오래다. 근거 없는 말이 아니다. 보고서 맨 뒤에 각주 달 듯 작은 글씨로 “중립은 향후 12개월간 수익률 -10~10% 예상”이라고 쓰여 있다. 손실을 입을 수 있는 종목이니 “팔라”로 이해하라는 뜻이다.

 아예 대답을 회피하거나 익명을 요구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최근 상장한 한 회사는 공모가를 밑도는 가격으로 장을 마쳤다. 하지만 그 이유에 대해 시원하게 대답하는 애널리스트가 없었다. 그나마 한 애널리스트는 “(해당) 회사 측에서 너무 민감하게 굴어 말하기 어려운 사정을 이해해달라”며 익명을 전제로 “상승 기대감이 없어 수용예측과 일반 공모 청약에서도 흥행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애널리스트는 “기자도 다를 바 없지 않느냐”고 항변할지 모르겠다. “기업 눈치를 보는 언론사도 있지 않느냐”고 말하는 증권사 관계자를 만난 적도 있다. 그들에게 “기자로서 제대로 잘하겠다”는 다짐과 함께 남에게 손가락질한다고 자신의 잘못에 면죄부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밤낮 고객 수익 극대화를 외치는 증권인에게 어울리지 않는 변명이다.

정선언 경제부문 기자 jung.sune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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