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토종 디자이너의 '대기업 짝퉁'과 전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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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신도희
신도희 기자 중앙일보 기자
요즘 인기 많은 토종 가방 브랜드 플레이노모어·BLC브랜드·콰니·오그램(왼쪽부터). [사진 각 브랜드]
신도희
피플앤섹션부 기자

최근 국내 패션계에선 몇몇 토종 가방 브랜드가 화제다. 해외 명품과 당당히 맞서며 나름의 영역을 개척해 가고 있어서다. 지난 10일자 본지 레저·스타일 섹션인 week&은 이들 중 4개 브랜드를 소개했다.

 잘나가는 이들 4개 토종 브랜드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 작품이다’ ‘블로그나 작은 매장에서 판매를 시작했다’ ‘가격이 10만~20만원대다’ ‘대기업·백화점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 등이다. 톡톡 튀는 아이디어에다 착한 가격으로 한발 한발 성장하고 있는 한국 디자이너들의 스토리는 흥미로웠다. 바로 이런 게 박근혜 정부가 부르짖는 ‘창조경제’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치’가 아닌 ‘가치’를 위해 가방을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늘고 있다는 사실도 놀라운 발견이다.

 그런데 취재 도중 4개 브랜드에서 또 하나의 공통점이 발견됐다. 바로 모조품, 일명 ‘짝퉁 가방’에 시달리고 있다는 점이다. 취재 중 만난 한 대표는 “모조품이 버젓이 TV 드라마에 연예인 협찬품으로 등장해 황당했다”며 “모조품을 잡아내는 데에만 한 달에 수백만원을 쓴다”고 말했다. 놀라운 건 또 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어느 대형 브랜드에서 이들의 디자인을 베끼고 있다는 것이다. 한 디자이너는 “소송을 하고 싶지만, 수천만원이 들어가는 소송을 할 자신이 없다. 그저 진심으로 사과하고, 더 이상 모조품을 팔지 말아달라고 요청했는데 ‘같은 업계 사람끼리 뭐 그리 팍팍하게 구느냐’는 대답이 돌아왔다. 또 다른 브랜드의 대표는 “동대문에서 베끼는 건 그렇다고 치자. 알 만한 브랜드에서 그러면 어쩌란 말이냐. 대형 브랜드에서 우리와 비슷한 디자인을 판매하다 보니, 어느 순간 우리가 그 브랜드를 베낀 게 돼 있더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명품도 오랫동안 모조품과 전쟁을 벌여왔다. 하지만 국내 신진 브랜드들이 처한 상황은 더 심각하다. 적어도 명품 브랜드는 소비자가 모조품인 것을 알고 구매한다. “가격 부담 때문에 ‘짝퉁’인지 알면서도 산다”는 소비자가 많다. 하지만 국내 신진 브랜드의 경우 짝퉁인지 모르고 모조품을 구매한 소비자들이 태반이다. 토종 브랜드를 제대로 알릴 기회조차 봉쇄되는 셈이다. 토종 업체의 한 디자이너는 “억장이 무너진다”고 했다.

 기자가 취재한 4개 브랜드는 모두 해외 진출에 성공했거나 계획 중이다. K팝에 이어 K패션의 성공 스토리를 과연 이들이 써 나갈 수 있을까. ‘창조경제’에 쏟아붓는 관심의 0.1%만이라도 짝퉁에 시달리는 이들 토종 디자이너들에게 쏟아 그들의 ‘창조정신’을 보듬어줬으면 한다.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 이런 ‘사소한’ 곳에서 창조경제의 성패가 갈릴 수 있다.

신도희 피플앤섹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