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파멸, 오후 6시 거사” 그는 왜 고려대박물관 노크했나

  • 카드 발행 일시2024.05.22

더 헤리티지 시즌2: 알면 더 보인다…‘기막힌 유물’의 재발견

도대체 이 유물은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걸까. 박물관이나 문화유산 현장을 다니다 이런 궁금증 가져보신 적 있으시죠. ‘더 헤리티지’가 시즌2에서 이 같은 유물들의 ‘기막힌 사연’을 소개합니다. 원래는 우리 삶의 한순간에 있다가 세월 속에 박물관 ‘보물’이 되기까지 스토리&히스토리를 캐냅니다. 우리가 잘 몰랐던 박물관의 흥미진진 뒷얘기도 함께 만납니다.

1973년 5월 4일. 고려대박물관의 현대미술실 개관식(5월 3일) 다음 날 이른 아침, 누군가 박물관 문을 두드렸다. 당직자가 빼꼼 문 밖으로 고개를 내미니 조각가 권진규였다.

“이른 시간에 실례지만, 전시실 좀 둘러보고 싶은데요.”

박물관 직원은 다소 당황했지만 문을 열어줬다. 전날 개관식에 참석했던 권진규를 알아봤기 때문이다. 마른 체구에 광대뼈가 두드러진 중년의 작가는 별말 없이 현대미술실을 찬찬히 둘러봤다. 특히 자신의 작품 석 점이 놓인 공간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실례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그게 사람들 눈에 띈 권진규의 마지막이다. 박물관을 떠나 동선동 아틀리에로 돌아온 권진규는 그날 오후 자신의 작업대에 목을 매 세상을 등진다.

192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한국 현대 조각의 거장. 2009년 일본의 명문 학교인 무사시노(武蔵野)미술대학이 개교 80주년을 맞아 선정한 대표적인 동문 작가. 스스로 조각가가 아닌 ‘장인’을 자처했고, 우리나라 미술계의 냉대 속에 스스로 목숨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권진규의 대표작 '자소상'(왼쪽)과 '비구니'. 모두 1973년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을 앞두고 소장됐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권진규의 대표작 '자소상'(왼쪽)과 '비구니'. 모두 1973년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실 개관을 앞두고 소장됐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그는 왜 자신이 결정한 생의 마지막 날에 고려대박물관에 갔을까. 이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 중에 이규호(1920~2013)라는 박물관 직원이 있다. 이씨는 1962년 8월 31일부터 1977년 3월 12일까지 고려대박물관 학예직(서기)으로 근무하면서 ‘현대작품수집일지’라는 기록을 남겼다.

이씨는 말년에 이를 박물관에 기증했다. 일지 곳곳엔 천재 아티스트의 예술 투혼을 격려하면서 그의 작품을 한 점이라도 더 팔아주려 애쓴 동년배 남성의 고뇌가 담겨 있다. 고려대박물관은 내년 개교 120주년 특별전을 앞두고 이 일지를 해제·연구 중이다. 그 중간 결과를 ‘더 헤리티지’가 입수했다. 빈센트 반 고흐와 그의 동생 테오처럼, 궁핍한 시대 낙심한 예술혼과 그 가치를 알아본 사람의 이야기다. 고려대 동문이라도 거의 몰랐을 사연, 고려대박물관 컬렉션의 뒷얘기를 만나보자.

미대도 없던 고려대에 몰려 있는 ‘찐’ 수작들

고려대학교 현대미술전시실 개관 50주년을 맞아 2023년 5월 4일부터 8월 19일까지 개최한 특별전에는 박물관이 자랑하는 순도 높은 컬렉션이 대거 선보였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고려대학교 현대미술전시실 개관 50주년을 맞아 2023년 5월 4일부터 8월 19일까지 개최한 특별전에는 박물관이 자랑하는 순도 높은 컬렉션이 대거 선보였다. 사진 고려대박물관

지난해 고려대박물관 현대미술전시실이 개관 50주년 특별전을 열었을 때 관람객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서양화로는 이종우·박수근·이중섭·김환기·장욱진·최영림 등이, 한국화로는 이당 김은호, 의재 허백련, 청전 이상범 등이 벽면을 채웠다. 권진규·송영수·김정숙 등의 조각 작품 또한 웬만한 미술관 소장품을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국립현대미술관과 호암미술관을 제외하면 그만큼 폭넓게 내용이 좋은 근·현대 미술 컬렉션이 달리 없을 정도”(이구열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라는 평가가 과하지 않다.

이 가운데 단연 관심을 끈 게 권진규의 대표작 셋이다. 지금은 점당 수억원을 호가하지만 생전에 팔린 그의 작품은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다. 그중에서도 관련 전시 때마다 대여 요청이 오는 수작이 고려대박물관에 모여 있다. 독자들도 한번쯤 이미지로 봤을 ‘마두’(1967), ‘자소상’ ‘비구니’(이상 1970년대 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