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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문 방북’ 뒤집은 날, 북한 “핵 소형화 단계” 으름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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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박근혜 대통령이 20일 오후 청와대를 방문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본관 현관에서 맞이하고 있다. 반 총장은 이날 오전 서울디지털포럼 연설에서 “오늘 새벽 북측이 갑작스럽게 외교 경로를 통해 저의 개성 공단 방북 허가 결정을 철회한다고 알려왔다”며 “이는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박종근 기자]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의 얼굴은 상기돼 있었다. 19일 인천 송도컨벤시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개성공단 방문 계획을 공개하며 “남북한 관계를 좀 실질적으로 진전시키는 데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한반도 평화는 유엔 사무총장으로서 제일 중요한 과제 중 하나”라고도 했다. 성사된다면 2007년 유엔 사무총장에 취임한 뒤 첫 방북이다.

 그러나 반 총장의 ‘기대’는 하루 만에 물거품이 됐다. 20일 오전 서울디지털포럼에 참석한 반 총장은 실망한 표정으로 “북한이 오늘 새벽 외교 경로를 통해 (개성공단 방문 승인을) 철회한다고 알려왔다”고 밝혔다. 그러곤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유엔의 한 관계자는 “개성공단 방문은 오래전부터 뉴욕 채널(북한의 뉴욕 유엔 대표부 주재 외교관)을 통해 협의해온 사항”이라며 “느닷없이 북한 측이 승인을 철회해 당혹스럽고,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반 총장이 말한 외교 경로는 뉴욕 채널을 의미한다고 귀띔했다. 한국 출신 유엔 사무총장의 첫 방북이 남북관계 개선의 호재로 작용할지도 모른다는, ‘혹시나’ 하는 기대는 ‘역시나’로 바뀌었다.

 박근혜 대통령도 개성공단 방문이 무산된 데 대해 이날 오후 청와대에서 반 총장을 만난 자리에서 “이번 사무총장의 개성공단 방문을 통해 개성공단의 현 상황 타개 등 남북 문제 진전에 좋은 계기가 됐으면 했다”며 “북한의 결정 번복이 유감스럽다”고 말했다.

 북한의 심상찮은 행동은 20일 연쇄적으로 이어졌다. 오후 김정은이 제1위원장으로 있는 국방위원회는 정책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우리 핵 타격 수단은 본격적인 소형화 단계에 들어선 지 오래며 중단거리 로켓은 물론 장거리 로켓의 정밀화·지능화도 최상의 명중 확률을 담보할 수 있는 단계”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러면서 “유엔 안보리는 미국의 독단과 전횡에 따라 움직이는 기구”라고 비난했다. 유엔을 비난하기 위한 목적이 담긴 성명이었다. 노동신문은 20일자에서 유엔 안보리의 대북 제재를 “조작”이라 주장하며 “포악무도한 적대행위”라고도 주장했다. 동국대 고유환(북한학) 교수는 “유엔은 북한 인권 문제 등을 적극 비판해왔다”며 “반 총장이 개성공단에서 대북 제재 해제 같은 듣기 좋은 말을 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문제는 북한이 외부세계와 문을 닫고, 내부에선 현영철 인민무력부장 처형 같은 공포정치로 회귀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정은 제1위원장은 당초 5월 8일 러시아에서 열리는 전승절 기념식에 참석하겠다고 해놓고 지난달 말 갑자기 이를 취소했다. 그러곤 현영철을 처형했고, 뒤이어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발사실험을 했다. 반 총장의 개성공단 방문 승인을 철회한 건 이 같은 흐름의 연장선이다. 외교 관례를 무시하면서까지 이런 결정을 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북한 전문가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동국대 김용현(북한학) 교수는 “한반도 정세나 핵문제 해법 등을 둘러싼 분위기가 안 좋은 상태에서 반 총장이 이벤트성으로 오는 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판단에 따라 제동을 걸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강대 김영수(북한 정치학) 교수는 “북한에 개성공단은 국제화 없이 지금 이대로 남측을 인질 삼아 안정적으로 외화벌이를 하는 곳”이라며 “반 총장과 함께 외신까지 와서 혹시나 임금체계의 불합리성이 조명되면 북한엔 좋을 게 없는 시나리오”라고 했다.

 최근 들어 연쇄적으로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북한식 도발의 끝을 걱정하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익명을 요청한 한 외교부 당국자는 “이런 흐름에서 북한이 추가 핵실험이라도 한다면 국제사회의 제재로 이어질 수 있다”며 “남북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수준으로 후퇴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글=전수진·안효성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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