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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사소한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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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일본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팬사이트를 둘러보는 걸 요즘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 ‘무라카미씨의 거처(村上さんのところ·www.welluneednt.com)’라는 제목의 이 사이트는 이달 15일 문을 열어 3월 말까지 운영된다(작가에게 보내는 질문은 1월 31일까지 받는다). 몇 년 사이 『1Q84』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여자 없는 남자들』 등의 작품으로 바빴던 작가가 “독자와의 소통이 너무 뜸했다”며 문을 연 사이트다.

 독자들이 보낸 질문 중 매일 15~20개를 골라 직접 답변을 달아준다. 그중 몇 개는 이미 화제가 됐다. 매년 노벨 문학상의 유력 수상후보로 거론되는 데 대해 그는 “솔직히 말해 꽤 성가시다”고 했다. “정식으로 최종 후보가 된 것도 아니고, 그저 민간 도박사가 확률을 정하는 것일 뿐. 경마도 아니고….” 요즘 일본 사회에 확산되고 있는 헤이트 스피치(혐오 발언)에 대해서는 “인종이나 출생 등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을 이유로 심한 말을 듣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며 단호한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팬에게 더 크게 와닿는 건 보다 개인적인 문답이다. 한 20대 독자는 “내일모레가 서른인데, 어른이란 게 뭔지 모르겠다”고 적었다. 그는 “어른이라고 하는 건 그릇 같은 것이다. 무엇을 담을지는 당신의 책임”이라고 말해 준다. 연애 한 번 못해 보고 인생이 끝날까 봐 두렵다는 30대에겐 “‘보통의 인생’이란 건 없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의 큰 성취”라고 보듬는다. 재치 있는 답변도 많다. “아내의 트림이 거슬린다”는 남편에겐 “방귀보다 트림이 낫지 않으냐, 상대적으로 좋게 생각하라” 하고, 성욕 없는 남편이 고민인 주부에게는 “남의 성욕에 대해선 잘 모릅니다. 죄송합니다” 하는 식이다.

 어쩌면 특별할 것 없는 질문과 답인데도 읽다 보면 마음이 훈훈해진다. 누군가의 고민을 귀담아 듣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진솔한 답변을 들려주는 행위 자체가 주는 어떤 감동이다. 30대 김현진 작가와 70대 라종일 서울대 명예교수가 주고받은 e메일을 모은 책 『가장 사소한 구원』을 읽으면서도 자꾸 울컥했다. 세상에게 받은 상처를 쏟아내는 김 작가에게 라 교수는 “세상이 자기에게 친절하길 기대해선 안 된다”고 했다. 단호하지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답변이다.

 “누군가에 손을 내밀어 붙들어주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붙들어 일으키는 것과 같다”고 라 교수는 썼다. 혼자 버텨내기 어려운 세상, 이런 사소한 구원을 그리워한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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