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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갑질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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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엄을순
문화미래이프 대표

나도 갑질 많이 해봤다. 비행기까지 회항시키는 간 큰 갑질이나, 종업원을 꿇어앉힐 만큼의 조폭 수준 갑질이나, 주차관리인 뺨을 칠 만큼 포악한 갑질은 아니더라도 과거를 뒤돌아보니 갑질깨나 해봤다.

 여자들이 갑질하는 이유는 대충 뻔하다. 물건을 사거나 바꾸거나, 음식점이나 마트의 서비스를 핑계 삼거나, 고장 접수 신청을 통해서거나. 오래전 얘기다. 인터넷 고장 접수를 신청했다. 요즘은 바로바로 처리가 되지만 초기에는 매우 더뎠다. 곧 연락 준다더니 며칠이 지나도 감감무소식. 전화를 했다. 인터넷 기사아저씨의 접수 누락 실수란 걸 알았다. 하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접수한 여자에게 온갖 불만을 터뜨리며 화를 냈다.

아무 잘못도 없는 그녀. 나도 다 안다. 하지만 나는 갑, 그녀는 을. 내친김에 그간 쌓인 다른 스트레스까지 몽땅 화를 내며 풀었다. 전화를 끊고 그녀는 울었을지도, 회사를 그만뒀을지도 모른다. 그때 난 왜 그랬을까. 그것까지도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라 생각했나, 무시당한 것 같아 자격지심에서 그랬나.

 회사와 소비자 사이에서 일종의 ‘불만 충격 완화 시스템’ 노릇을 했던 그녀. 당사자에게 잘잘못을 따져 물었다면 소비자의 당연한 권리행사였겠지만 잘못도 없는 그녀에게 화를 낸 건 전형적인 몹쓸 갑질이다. 생각해보니 미안할 따름이다.

 ‘땅콩 회항’ 사건이나 백화점 주차장 모녀 사건도 무릎을 꿇리고 인격적으로 모욕하는 대신 절차에 따라 잘못을 처리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걸 그랬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계속 갑이거나 을인 사람은 없다. 상황에 따라 갑도 됐다 을도 됐다 변신한다.

 아파트 복도 청소를 제대로 안 했다고,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주며 무릎 꿇고 바닥의 껌을 떼게 하는 사람. 전단지 돌리는 사람을 출입시켰다고 아버지뻘 되는 경비원에게 ‘그렇게 일하고도 월급 받아 가냐’고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사람. 그들도 회사 가면 갑질 상사 밑에 을이 되고, 경비아저씨와 청소아줌마도 식당이나 마트에서 진상을 부리면 갑질하는 갑이 된다. 갑질 횡포를 당한 을은 받은 만큼 자기 을에게 갑질하고, 당한 을은 또다시 갑이 되어 갑질하고.

 요즘 들어 갑자기 갑질 횡포가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갑질하는 사람 수가 늘어난 건 아니다. 누군가의 스마트폰에 찍혀 순식간에 퍼진 탓이다. 다 스마트폰 덕인 게다. ‘너와 나의 갑질. 누군가는 보고 있다?’ 이제 무심코 갑질했다가는 큰코다치게 생겼다. 스마트폰이 좋은 일을 해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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