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분수대

덕수씨네 큰아들의 우울한 새해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1면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아침 밥상에서 펼쳐 든 신문에 대통령·총리·부총리가 한자리에 모여 웃고 있는 사진이 커다랗게 앉혀져 있다. ‘뭔 국가적 경사라도 났나.’ 40대 회사원 윤도주씨는 씁쓸한 입맛에 한술 뜨고 서둘러 넥타이를 맸다. 지갑·스마트폰과 함께 전자담배를 주섬주섬 챙기는 순간 아내의 잔소리가 뒤통수에 꽂혔다. “그게 몸에 더 나쁘대. 뉴스에 나왔어.”

 ‘뉴스?’ 청와대 ‘십상시’ 중 하나가 술자리에서 위세 떨다가 사표 내 이젠 ‘구상시’가 됐다는 것 말고는 요즘 마음에 드는 뉴스가 없었다.

 출근길 내내 집주인이 다음달까지 올려 달라는 전세금 3000만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나마 사정해서 1000만원 깎았는데 은행 대출 추가, 아니면 아버지에게 손 벌리기 말고는 수가 생각나지 않는다. ‘전세 빼서 신도시 아파트를 살까.’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입시생 아들의 학교·학원을 옮길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연말에 애들 데리고 부산 친가에 갔을 때 기회를 틈틈이 엿봤지만 입도 떼지 못했다. “맨몸뚱이로 흥남 부두에서”로 시작해 독일 탄광 사고, 베트남전으로 이어지는 일장 연설을 떠올리며 우물쭈물하다 그냥 돌아왔다.

 회사에 도착해 메일함을 열었더니 연말정산을 재촉하는 공지사항이 보인다. 며칠 새 고교 동창 ‘밴드’가 ‘돌려받기는커녕 토해내게 생겼다’는 글들로 도배되다시피 해서 착잡한 마음에 차일피일 미뤄오던 일이었다. 연봉 7000만원이 넘는 나 같은 직장인은 100만원 이상 더 내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정산 서류 작성하다 하마터면 노트북 던질 뻔했다. 한 시간 넘게 씨름을 했는데도 끝이 안 보인다. 안경 값도 공제 대상이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영수증을 어디에서 찾나. ‘이런 것도 모르고 있었으니 돈을 모을 수가 있나.’ 난데없이 자책감이 밀려왔다. 대충 마치고 시뮬레이션을 해보니 40만원 이상 내야 하는 것으로 나온다. ‘증세 없다던 말을 믿은 내가 바보지.’ 급여 날 줄어든 월급을 보고 짜증 낼 아내의 얼굴과 함께 어제 퇴근길에 기획실 동기가 귀띔해준 말이 떠올랐다. “실적 좀 올려. 조만간 인력 조정이 있어.”

 점심 시간, 구내식당이 부쩍 붐빈다. 다들 몸도 마음도 추워 ‘짬밥’으로 해결하는 모양이다. 식사 뒤 편의점에서 4500원짜리 담배를 처음으로 샀다. 금연은 3주 만에 깨졌다. 덕수씨네 큰아들 도주씨는 허공에 연기를 내뿜으며 나지막이 외쳤다. “아부지예, 지들도 억수 힘들어예!”

이상언 사회부문 차장

▶ [분수대] 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