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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3가지가 없는 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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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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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정치민주연합의 박영선 원내대표가 결국 돌아왔다. 이런저런 수사를 늘어놨지만 한마디로 개혁의 칼을 접고 항복하겠다는 뜻이다. 국민공감혁신(비상대책)위원장이란 자리가 비상대권을 쥔 줄 알았지만 착각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결국 비대위원장은 문희상 의원이 맡았다. 문 위원장에게 문제가 있다는 건 아니다. 문제는 그 과정이다. 당내 주요 계파들은 외부 인사를 배제하고 차기 당권·대권을 노리지 않는 당내 인사, 계파성이 약한 중립인사를 요구했다. 확 뒤집기보다 어물쩍 봉합해 모양만 내겠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실망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별로 없다. 신문에서, 방송에서 정치평론가들이 열을 올려 떠들지만 시민들에겐 ‘당신들의 일’일 뿐이다. 박 원내대표가 물러나건, 그것이 실패했건, 그리고 그것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건 관심이 없다. 그게 자신들의 생활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다. 개혁한다고 호들갑 떨다 제 풀에 주저앉는 쇼를 어디 한두 번 봐야 말이지. 무서운 건 그런 무관심이다.

 당장 먹고사는 일이 급하다. 일자리가 줄어 자식들이 이력서만 들고 다니는 게 슬프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자살 노인들의 형편이 절박하다. 7·30 재·보선에서 표출됐고, 추석 때 귀향한 의원들도 귀가 따갑게 들었던 이야기 아닌가. 그런데도 예산국회마저 제쳐놓고 집안싸움이라니….

 박영선 원내대표의 사퇴설을 지켜보다 고(故) 이중재 전 의원이 생각났다. 필자가 정치권을 취재하기 시작한 1987년 그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하 DJ)의 대리인이었다. 계보모임인 민주인권연구회 회장을 맡았다. 대외적으로 중요한 결정은 그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런 그가 평민당 ‘특무상사’(야당에 오래 몸담았지만 의원이 되지 못한 고참 당직자)들로부터 몰매를 맞은 것이다. 여의도 대하빌딩 건물 외벽에 걸린 비상계단을 통해 9층 회의실에서 1층까지 주먹질을 당하며 끌려 내려가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물론 박 원내대표와는 다른 경우다. 닮았다면 자기 이해가 걸리면 하루아침에 안면몰수하는 정치권 세태다.

 총선을 앞두고 야권을 통합하자고 주장한 것이 이 전 의원의 죄였다. 87년 김영삼·김대중씨의 분열로 정권교체에 실패한 직후다. DJ에게는 총선보다 5년 뒤 다음 대통령선거가 중요했던 셈이다. 호남표로 이긴다는 ‘4자 필승론’의 뒤끝이다.

 당시 3김씨의 위세는 그렇게 당당했다. 지역감정 덕분이다. ‘말뚝만 박아도 당선된다’는 조롱이 나왔을 정도다. 공적이 많은 3김 정치가 청산 대상이 된 이유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을 상징하는 가짜 깃발을 방패 삼아 변화를 거부하는 세력이 있다.

 3김씨에게는 확고한 지지층이 있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이 그런 지지층을 가진 마지막 정치인이다. 그래도 그런 힘이 있어 가끔은 화장을 하고 새로운 시도도 할 수 있었다. 민정당 2중대였던 민한당을 물거품처럼 날려버리고, 선거 때마다 절반 가까이 물갈이 공천하고, 수시로 당을 개조했다. 그러나 이제 그런 힘이 없다. 새로운 질서도 없다. 그 힘의 공백을 차지하려는 치졸한 파벌싸움만 남았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산의 본질은 외면하면서 껍데기, 가짜 깃발만 높이 든다.

 오히려 전직 대통령들은 실용주의자였다. DJ는 ‘악마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고 했다. 김종필 전 총재와 손을 잡을 때도, 북한 핵 문제를 다룰 때도 그런 논법을 썼다. 노무현 전 대통령마저 자신과 완전히 반대 이미지를 가진 정몽준 의원과 손을 잡고, 한나라당에 연정을 제의했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지, 누구와 하느냐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다.

 DJ는 “정치인은 국민보다 반 발짝 앞서서 손을 잡고 가야 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 너무 앞서가 국민과 떨어지면 힘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을 쫓아가는 것도 경계했다. 그렇게 되면 비전도, 방향도 잃어버린다. 그 역할을 정치인이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더 많이 고민해야 한다.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최근 야당에는 그런 고민이 없다. 여론만 좇아 다닌다. 비겁하지만 고민도 책임도 없다.

 그런 기준으로 따져보라. 세월호 수사권이 왜 필요한지, 무엇을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다. 그것이 예산국회를 포기할 만큼 중대한 일인가. 앞으로 권력형 비리 수사는 어떻게 할 건가. 다수당이 되면 워싱턴포스트와 르윈스키가 특검을 직접 임명하도록 해주겠다는 뜻인가.

 이제 3김 시대는 아니다. 지역할거주의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 정말 ‘새 정치’가 절실하다. 국민이 어떤 정치를 원하는지 진정한 고민이 필요하다. 또다시 이름뿐인 ‘비상’, 말로만 ‘개혁’으로는 감동이 없다.

김진국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