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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김진국 칼럼

불쌍한 놈, 나쁜 놈, 멍청한 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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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김진국
김진국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칼럼니스트
김진국
대기자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접촉사고는 여성 운전자를 무척 괴롭혔다. 잘못한 것이 없어도 험악한 인상으로 고함을 지르는 운전자에게 혼비백산하곤 했다. 요즘은 그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핏대 올린다고 달라질 게 별로 없어서다. 블랙박스 덕분이다. 악을 쓰는 게 통하는 사회에서는 약한 사람, 착한 사람이 피해를 보게 된다.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사리에 맞게 일이 처리돼야 정상적인 사회다.

 악을 쓰는 사람만 나쁜 게 아니다. 조용히 있으면 손해 보는 사회에서는 고함이 자구책이다. 악을 쓰기 전에 들어주고 챙겨 주는 사회에서는 핏대를 올릴 사람이 드물다. 저절로 과격하고 극단적인 주장, 반이성적인 언행을 용납하지 않게 된다. 이런 제도를 다져 나가야 약자에게 유리하다.

 세월호 유족이야 무슨 말인들 못 하겠는가. 자식을 잃은 사람들이다. 앞뒤를 가려 가며 남 생각까지 해 달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조용히 기다리면 누가 쳐다보기나 하겠는가. 이들과 슬픔을 함께 나누며 위로하고, 이들에게 힘이 돼 주려는 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착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반드시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는 건 아니다. 상황을 이용하고, 잘못된 정보로 갈등을 조장하고, 자극하는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갈팡질팡 함께 휘둘리는 정부와 정치권은 멍청하거나 무책임하다. 사회 각 부문이 다양한 요구를 쏟아내도 잘 수렴해 합리적으로 조정하는 것이 그들이 할 일이다. 덩달아 흥분하고, 휘둘리면 나라 꼴이 엉망이 될 수밖에 없다.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의원들은 광화문에서 ‘세월호 유가족 요구대로’라는 피켓을 들었다. 두 번의 합의를 뒤집고, 국회를 버리고, 거리로 나선 건 그렇다 치자. 무엇을 주장하는지도 분명하지 않다. 그냥 ‘유가족 요구대로’다. 논리도 명분도 없다. 유족에게 끌려 ‘원치 않는’ 단식을 하고, 이제 그 지시에 따라 마무리할 태세다.

 예로부터 가뭄에 곳간을 풀지 않는 부자들은 두고두고 지탄을 받았다. 그러나 사재(私財)와 정부 재정은 다르다. 내 돈처럼 인심을 쓸 수는 없다. 국민의 빚이다. 배임이 된다. 나라 도처에 안타까운 사정은 너무나 많고, 재원은 한정돼 있다. 부족하더라도 억울한 사람이 없게 고루 잘 배분하는 것이 정치가 할 일이다.

 남부지방 폭우 피해가 심각하다. 재난 경보와 위험지역 설치, 안내가 없었다며 ‘인재(人災)’라는 지적이다. 정부 책임이 크다. 창원에서는 시내버스가 불어난 물에 떠내려가 7명이 희생됐다. 무리하게 운행을 감행했고, 정해진 노선을 우회했다고 한다. 물이 들어찰 때 빨리 대피시키지도 않았다. 유가족대책위도 만들어 진상을 밝히자고 한다. 그러면 여기에도 특별법을 만들 건가.

 진상은 밝혀져야 한다. 그 결과에 따라 보상이나 배상도 이뤄져야 한다. 정상적인 절차라면 정부가 조사를 하고, 그 결과에 따라 피해자나 그 가족이 소송을 제기해야 한다. 재판을 통해 배상을 하고, 책임자도 처벌하게 될 것이다. 그 피해가 크거나 정부 조사가 미진하다면 국회에서 진상조사를 하고 보고서를 낼 수도 있다. 세월호의 경우 재발 방지를 위해서도 정치적인 처리가 불가피하다. 하지만 예외가 너무 많아지면 형평성이 무너진다.

 유가족은 ‘진실’을 원한다고 한다. 정부 권력이 사건에 연루돼 있어 검찰·경찰의 조사를 못 믿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수사·기소권을 달라, 특별검사를 임명하자고 한다. 강도·살인을 당한 경우라도 피해자 측이 직접 수사하는 경우는 없다. 조사 결과를 피해자뿐 아니라 다른 국민도 믿어야 하고, 가해자라도 억울한 일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논란의 핵심은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그동안 확인된 내용만으로도 윤곽은 거의 다 나왔다. 희생자 파악이 늦었다는 것은 정부도 이미 시인한 것이다. 오후 1시30분에도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는 ‘구조 368명, 사망 2명’이라고 발표했다. 구조자가 164명이라고 고쳐 발표한 건 오후4시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대본을 방문하기 겨우 한 시간 전이다. 대형참사란 걸 안 것은 이미 구조작업이 어려워진 이후란 말이다. 그런데 누가 무슨 이유로 무엇을 더 감출 것이라고 의심하는 걸까. 야당이 두 번이나 합의한 것도 그 때문 아닌가.

 그래도 궁금하다면 유족들이 원하는 특검에 수사를 맡기는 수밖에 없다. 그건 국정을 운영하는 정부·여당의 몫이다. 그것이 정치의 영역이다. 제도를 바꾸지 않아도 방법은 수없이 많다. 숫자 놀음을 버리고, 구체적 인물로 협상하는 방법도 있다. 민생 법안, 예산안 심사가 급하다면 그 정도 정치력은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더 지체할 이유가 없다.

김진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