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발만 삐끗하면 추락하는 절벽사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 일자리를 구하려는 의욕마저 잃은 이른바 니트(NEET)족 300만 명….
한국사회의 위기를 전하는 표현들이다. 건조한 숫자들이 사람들 내면의 위기까지 다 전하지는 못한다. 그 내면을 들여다 보니 상황은 예상보다 심각했다. 서울대 사회학과 이재열 교수가 베이비붐 세대(1955∼63년 출생자)와 에코붐 세대(79∼92년 출생자)를 진단한 결과다. 경제력(안정집단·위기집단)·성별에 따라 5∼8명으로 이뤄진 8개 그룹으로 나눈 후 한 달간 심층면접했다.
이 교수는 “한국인의 심층을 들여다봤더니 기존 제도와 규칙에 대한 불신이 심각했다. 특히 부정적 에너지가 커서 놀랐다”고 했다. 사회의 불공정성에 대한 분노로 사람들 마음이 부글부글 끓고 있다는 얘기다.
그런 분노의 원인 은 어떤 것이고 해결책은 뭘까. 이 교수는 연세대 사회학과 한준 교수 등과 1년가량 연구한 내용을 13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정책재단(이사장 서석해)의 창립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했다. 심포지엄 주제는 ‘한국인, 그 마음의 행로’다. 이 교수 팀에게 연구를 의뢰한 한국정책재단은 지난달 발족한 싱크탱크다. 장기 국가발전 과제를 개발하는 게 목표다.
◆3불(不)사회의 덫=이 교수는 한국사회의 위기 현상을 ‘3불’로 요약했다. 제도나 규범에 대한 불신, 눈높이보다 초라한 현재에 대한 불만, 미래에 대한 대책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 세 가지가 한국인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는 분석이다.
이 교수는 “심층면접을 해보니 번듯한 공기업의 소위 잘나가는 젊은 직원이 100억 원을 버는 게 목표라며 일과 시간 이후에 온통 주식투자에 매달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소개했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현재에 만족 못하는 불안의 상승 현상이다.
그는 또 “과거 고도성장기에는 최저임금제·의료보험 등 최소한의 사회 안전장치를 발 빠르게 시행하며 무역 의존도 높은 경제를 끌고 왔는데, 사회적 합의가 아닌 관치에 의존해 문제였다”고 지적했다. 관치를 고집하기에는 국제경제 상황이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우리와 비슷하게 무역의존도가 높은 독일처럼 국민 참여를 바탕으로 한 사회적 합의 체제 없이는 변화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저출산, 모험을 회피하는 안전주의의 확산 등으로 지속가능성의 위기, 먹고 살기 힘든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해결책은 없나=이 교수는 “창조적인 괴짜를 인정하는 관용, 실패해도 모든 것을 잃지 않는 풍토가 시급하다”고 했다. 이 교수 발제에 이어 해법 제시 성격의 소주제 발표자로 나선 이채필 전 고용노동부 장관은 “지속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직무·성과·숙련급 도입을 통한 임금체계 개선, 대기업 정규직의 이익만을 대변하는 노동단체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또 정진영(경희대 국제학부) 교수는 “국가 운영 효율화를 위해 현 대통령제의 의원내각제적 요소를 제거하거나, 대통령과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는 이원집정부제를 검토할 만하다”고 했고, 이장우 창조경제연구원장은 “문화나 심리적 영역의 만족도를 높이는 데 정책적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날 사회는 재단 상임이사를 맡은 김두우 전 청와대 홍보수석이 봤다. 그는 “한국인의 내면 변화의 추이를 확인할 수 있도록 심층면접 조사를 매년 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글=신준봉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국정책재단=통일·실버·정치·소상공인·사회 등 5개 분야에 걸쳐 실제 채택 가능한 국가정책을 개발한다는 목표로 지난달 발족했다. 미국의 헤리티지 재단, 브루킹스 연구소와 같은 싱크탱크를 지향한다. 청와대 홍보수석을 지낸 김두우 씨가 상임이사를 맡았고, 김석동 전 금융위원회 위원장, 박찬욱 서울대 교수, 손연기 전 정보문화진흥원장, 김승남 조은문화재단 이사장,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등이 참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