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석 장난감에 온몸 던졌다, 미국 본사까지 접수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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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2면

박기영 한국짐보리 ㈜짐월드 대표가 ‘맥포머스’로 만든 모형을 보여주고 있다. 왼쪽 벽면의 모형들도 맥포머스로 만든 것이다. [박종근 기자]

1992년 6월, 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조지워싱턴대의 강의실에서 경영학석사(MBA) 과정 마지막 수업을 듣던 청년의 눈이 반짝였다. ‘베네통의 키즈(Kids)마케팅 기법’에 대해 토론하던 중 미국인 노(老)교수가 던진 말이 그의 뇌리에 박힌 것이다. “사업을 생각하나? 그렇다면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봐라.”

 29세 청년 박기영은 순간, 우연히 방문했던 미국 영·유아 놀이교육 회사인 ‘짐보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강의실을 나오자마자 ‘길’을 틀었다. MBA 졸업과 동시에 일본 도시바에 취업하기로 돼 있었지만 짐보리 본사로 행선지를 바꿨다. 짐보리는 76년 미국에서 개발돼 영국·호주·프랑스·캐나다 등 세계 30여 개국에 센터를 운영하는 놀이학습 업체였다.

 “한국을 생각했죠. 영·유아 시설이라면 애들 봐주는 곳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인 곳에 교육과 놀이를 접목한 시설을 론칭한다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선 겁니다.” 특히 한국 어머니들의 교육열은 성공을 확신하게 한 가장 큰 배경이었다. 그래서 ‘엄마와 함께하는 놀이교육’이라는 모토를 앞세웠다. 하지만 위험 요소도 만만치 않았다. 일단 귀국 전부터 부모와 지인들을 설득해 빌린 7억원의 사업자금부터가 부담스러웠다. 규모는 물론 교구·교사 등 모든 걸 그동안 한국에서는 경험하지 못했던 수준으로 만들어야 했다.

 그해 7월 한국 사업권을 손에 쥐고 귀국한 그는 명함을 찍었다. ‘한국짐보리 ㈜짐월드 대표 박기영’. 박 대표는 1호 센터로 서울 서초동 법조타운 근처를 선택했다. 센터 크기도 165.29㎡(50평) 정도로 하고 인테리어 비용을 아끼지 않았다. 교사들은 전부 4년제 대학 출신자들로 구성해 교육을 다시 시켰다. 특히 만족하지 못한다면 100% 환불해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1년이 지나자 이곳저곳에서 지점을 내겠다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철저히 인구밀도와 교육열을 중심으로 분석하고 지점을 열게 했다. “이듬해에 6개로 그 다음해엔 15개로 확대하는 등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아지면 프로그램의 질을 맞출 수 없을 거란 생각 때문이었죠.” 그는 “1등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각오를 지금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쟁에서 2등은 죽은 목숨”이라는 말도 했다. 그래서 현재 50여 개인 지점을 더 이상 늘리지 않을 생각이다. 이 때문에 한국짐보리센터의 매출은 연 100억원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일생일대의 도전은 창업 10년이 지나면서 다가왔다. 교육 프로그램을 궁리하던 그는 자석을 이용한 놀이기구를 떠올렸다. 플라스틱 막대나 공 안에 자석을 넣어 이것들을 떼었다 붙였다 하면서 여러 모형을 만드는 형태였다. 생각은 곧 실행이 됐다. 2003년 ‘짐맥’이라는 이름으로 자석놀이기구가 탄생했다. 국내 최초의 자석놀이교구였다. 이 기구는 곧 미국 짐보리 본사에 수출까지 됐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석놀이기구를 짐보리 내에서 활용하는 수준으로만 생각했어요.” 한데 몇 년 후 미국에서 자석을 활용해 일반인들에게 판매하는 회사가 생겨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세모·네모·육각형·입체삼각형 등 다양한 형태의 조각들에 자석을 넣어 서로 대기만 하면 여러 평면 혹은 입체 모형을 만들 수 있는 ‘맥포머스’라는 조립형 놀이기구였다.

 국내에 이 기구를 들여와야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회사 내부의 반대가 심했다. 교육적인 효과는 크지만 장난감 시장에 내놓기엔 사업성이 낮다는 이유에서였다. “창업 초기처럼 확신이 들었습니다. 교육효과가 있는 놀이기구는 성공한다는 확신요.” 2007년 그는 맥포머스를 국내에 들여왔다. 직원들이 옳았을까. 매출은 1000만원도 안 됐다. 구체적 수치를 제시하기조차 민망한 수준이었다. 새로운 마케팅 방법이 필요했다. “가지고 노는 기구잖아요. 그러니 직접 노는 모습을 보여줬지요.” 박 대표는 한참 시장을 넓히고 있는 홈쇼핑을 주시했다. 이듬해 10월 GS홈쇼핑에 제품을 내놓았다. 예상은 적중했다. 첫 방송부터 판매량이 120%나 됐다. 이듬해 홈쇼핑 매출만 143억원이나 됐다. 2011년 상반기에는 GS홈쇼핑 판매 1위에 오르기까지 했다. 지난해에는 롯데홈쇼핑 전체 3위에도 선정됐다.

 판매전략만 적중한 게 아니다. 2010년에는 뜻하지 않은 기회까지 찾아왔다. 그해 12월 미국 맥포머스 래리 헌트 사장이 갑작스러운 제안을 해왔다. 아예 맥포머스 본사를 인수해볼 생각이 없냐는 제의였다. 솔직한 이유도 들었다. 자석의 원료가 되는 희토류 값이 중국 정부의 자원정책 때문에 급등하는 게 두렵다는 것이었다. “빨리 결정하지 않으면 제안은 다른 곳으로 넘어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일단 계산기부터 두드려 봤습니다.” 희토류 가격이 4배 정도 될 때까지는 감내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는 제안받은 지 15일 만에 회사를 인수해버렸다. 판권만 가지고 있던 한국중소기업이 미국 본사를 인수해버린 것이다.

 기쁨도 잠시, 오판이었다는 말들이 나왔다. 이듬해 3월부터 중국발 기사들이 숨통을 조여왔다. 희토류 가격이 6월까지 무려 7배나 뛰었다. “이러다가는 훗날 ‘자석으로 놀이기구를 만들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나 들려주는 처량한 신세가 되겠구나 하는 두려움도 들더군요.” 주위에서는 이미 구입해놓은 희토류(30억원어치)를 되팔면 엄청난 흑자를 남길 수 있으니 빨리 발을 빼라는 ‘충고’들이 쇄도했다. “돈만 벌려고 생각했으면 그렇게 했죠. 하지만 자석공구사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는 사명감 비슷한 게 들더군요.” 그는 버텼다. 다행히 가을이 되면서 희토류 가격은 진정됐다. 맥포머스 홈쇼핑 판매액도 그해 400억원 가까이 됐다. 이쯤 되니 국내가 좁아 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이 회사를 인수했던 미국으로 눈을 돌렸다. 2012년 6월, 미국 미시간에 자회사를 설립하고 미국 시장을 공략했다. 미국 최대 완구전문매장인 토이저러스, 서점 유통체인인 반스앤노블은 물론 세계 최고 온라인 유통 기업인 아마존 등 온·오프라인을 뚫었다. 지난해에는 아마존에서 조립완구 부문 판매 3위에 올랐다. 수출하는 나라만 20개가 넘었다. 이런 성과 덕에 지난해 무역의 날 ‘500만불 수출의 탑’을 수상했다.

 이쯤 되면 ‘수성(守成) 전략’으로 전환할 때도 됐을 법한데 박 대표는 고개를 저었다. “독보적인 것 너머에 더 독보적인 게 있겠죠. 자석놀이공구가 어느 정도까지 발전할 수 있는지 도전해 보겠습니다.” 그의 도전정신은 벌어들이는 돈으로만 입증된 게 아니다. ‘2012 대한민국 명품브랜드’ 창의력 교구 부문 대상은 물론 2012년과 2013년에는 세계 최고 권위의 독자적인 소비자 평가기관인 ‘오펜하임 토이 포트폴리오’가 선정한 최고의 상인 플래티넘상을 받았다. 2011년부터는 서울 세종과학고 수학체험전 교구로 채택돼 활용되고 있다.

글=문병주 기자
사진=박종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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