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집 『다른 모든 … 』 펴낸 은희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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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은희경의 신작 소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매순간 예상치 않았던 낯선 곳에 당도하는 것이 삶이고, 그곳이 어디든 뿌리를 내려야만 닥쳐오는 시간을 흘려보낼 수 있다’는. 그의 작품은 우리를 관통하고 지나간 시간의 흔적들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개성이 중요하다면서도 다름에는 관대하지 않다. 같은 듯하지만 다르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은희경(55)의 신작 소설집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문학동네)는 그런 우리의 무뎌짐과 무감각을 깨우는 찬 눈송이 같다. “소설은 모든 사람에게 개인을 찾아주는 것”이라고 말하는 그가 ‘단 하나의 눈송이들’에 집중했다.

 책에 실린 6편의 단편은 연작의 형태를 빌려 인물과 사건이 겹치고 맞닿으며 한 편의 느슨한 장편처럼 읽힌다.

 “장편으로 쓰려면 인물들 사이의 관계를 맺어야 하고 이음매를 고민해야 해요. 그런데 연작은 독립된 이야기를 쓰면서도 전체적인 풍경을 보여줄 수 있죠.”

 그가 닮은 듯 다른 각각의 단편으로 엮어낸 전체 풍경은 ‘고독의 연대’다.

 “이번 소설집 속 인물은 다 고독해요. 그런데 고독을 이겨내려 하거나 고통받지 않아요. 그냥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고 자기 방식대로 살죠. 남과 똑같이 살지 않아도 괜찮다. 너는 한 사람이라도 괜찮다. 그런 사람들이 다 모여있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고독의 연대에요.”

 결혼과 동시에 신도시로 옮긴 새댁(‘프랑스어 초급과정’)이나 조기유학을 떠났다가 입대를 위해 귀국한 청년(‘스페인 도둑’),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간 모자(‘T아일랜드의 여름 잔디밭’) 등 소설 속 인물은 각자의 고독을 안고 있다. 외국에서 이방인으로 겉돌거나 자신이 살고 있는 삶에 튼튼하게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흔들린다.

 인물들은 삶에도 서투르다. 셈에 어둡거나 길치거나 기계를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 그렇지만 태연하다. 루저같다고 좌절하거나 자학하지 않는다. ‘나는 이런 사람이다’고 받아들이며 상처받지 않는다.

 고독한 개별자가 연대할 수 있는 것은 낯선 이들이 유지하는 거리 덕분이다. ‘이방인의 부축이란 사랑하는 이의 헌신이 결코 줄 수 없는 방심과 편안함을 제공한다’는 소설 속 구절처럼. “너무 가까워지면 ‘관계’가 개인을 삼키고, 너무 멀어지면 거리가 ‘고립’을 낳는다”는 문학평론가 권희철의 평처럼 .

 “여행을 하다 보면 친절한 사람을 만나잖아요. 근데 낯선 사람이라서 친절할 수 있는 부분이 있거든요. 가족이라면 안 하는. 가까운 이들의 사랑과 헌신에는 책임이 따르고 그 다음이 있으니까. 얽힌 게 많은 거죠. 하지만 스치는 인연, 가벼운 존재끼리는 오히려 연대할 수 있고 그게 따뜻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공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시간의 거리도 중요하다고 했다. 연작의 형태를 빌려 긴 시간을 끌어들인 것도 그래서라고 했다.

 “자기 인생에 지나치게 몰입하지 않으려면 시간의 이동도 필요해요. 나중에는 별것도 아닐 텐데 왜 지금 이렇게 매달리나 생각하려면 시간을 넓혀서 봐야 하죠. 시간을 확장해서 풍경을 보면 달리 보이니까요.”

글=하현옥 기자
사진=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은희경=1959년 전북 고창 출생. 9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 『새의 선물』 『소년을 위로해줘』 『태연한 인생』. 소설집 『상속』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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