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성도지 부다가야(2)|노산 이은상<제자·이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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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파트나」를 떠나, 남으로 내려가는 들판 길에는 햇볕이 너무도 뜨거운 한낮이라 그런지, 사람 하나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 길가에는 남국에서만 볼 수 있는 야자수 나무들이 줄지어 서있어, 더위에 시달린 눈을 얼마쯤 시원케 해주는 것 같았다.
진나라 학자 좌사의 오도부에 『야자수는 키가 열길이나 되는데, 잎사귀가 나무 끝에만 있어 그늘이 없다』한 것을 글로만 읽었더니, 인도에 와서 보니 과연 그대로다. 그야말로 그늘 없는 가로수다.
더구나 야자수를 「월왕두」라고 별칭해 부르는 살풍경한 이야기가 생각나 쓴웃음을 웃기도 했다.
옛날 임읍나라 왕이 월나라 왕에게 무슨 함원이 있었던지, 자객을 시켜 그를 죽여 머리를 나무에 메어 달게 했더니, 그것이 화하여 「야자」가 되었다고 해서 「월왕의 머리」라는 이름이 붙게된 것이라고 학명에 적혀 있다.
그러나 그보다는 『야자수 열매로 만든 술을 먹으면 머리가 검어진다』는 광동신어의 기록이 더 구미당기는 이야기이지마는, 그것도 술 못 먹는 내게는 소용이 없고, 다만 시원한 찬물 한 모금이 더 간절한 소원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찬물 한 그릇을 구해먹을 수 없는, 그야말로 목마른 인도여행이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옛날 승려들의 여행에 비겨, 얼마나 호강스런 시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동진 때(서기399년) 법현이 인도의 성지를 순례했던 불국기에는 『아득한 만리 길에 새들도 날지 않고, 짐승도 달리지 않고, 다만 하늘과 땅이 서로 맞닿아, 어디가 어디인지 분간할 길이 없다. 가다가 우두커니 섰노라면, 뜨거운 바람과 모래흙이 눈과 귀를 때리고, 시체와 마른 뼈다귀들이 뒹구는 속을 헤맬 따름이다』하고 적혀 있음을 본다. 어디 그 뿐인가, 그로부터 2백여 년이 지난 당나라 때의 승려 의정(635∼713)의 「구법기」에도 인도순례의 어려움을 말했으되 「진·송·제로부터 당에 걸쳐서,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간 사람들이 백을 헤아리지만, 돌아온 이는 10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고 적은 만큼, 옛날의 인도여행이란, 거의 죽음을 각오하고 결행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거기에 비기면 오늘의 불타 성지 순례는 너무도 쉬운 편임을 깨달을 뿐, 입다물고 아무런 짜증도 낼 것이 아니었다.
「파트나」에서 떠나 90㎞를 달린 끝에, 큰길에서 바른 편으로 꺾어 들어가 「날란다」(나난타)란 곳에 이르렀다.
여기는 불타이전 인도 고대종교의 도장이 있던 곳이기도 하고, 또 불타자신도 여기서 설법한 일이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곳이다.
서역기에는 옛 노인들의 전설을 인용하여, 이곳 남쪽 「암라팔리」(암나위원) 숲 속에 못이 있고, 그 못 속에 용이 있었는데, 그 용의 이름이 「날란다」였고, 그 곁에 절을 지으면서 그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게 되었다고 적고서, 큰 장사꾼 5백명이 10억의 돈을 내어 동산을 사서 불타에게 바쳤고, 그래서 불타가 여기서 3개월 동안이나 설법을 했으며, 또 그들 5백명 상인들도 모두 증과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혜림음의에는 「암라팔리」가 용의 이름이 아니라 「빔비사라」왕(빈파사나왕)의 왕비로서, 「암마라」나무 꽂 숲 속에서 났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요, 그가 뒷날 불타에게 귀의하여 그 동산을 바친 것이라고 적혀 있다.
하지만, 이곳 「날란다」의 역사를 적자면, 그런 이야기보다는 오히려 불타가 열반한 뒤, l천년이 지나, 「샤크라아디트야」왕(학가나아일다왕, 흔히 일컫는 제일왕 415∼455)이 여기에 사원을 창건했고, 그 이후 여러 제왕, 특히 「하르샤」왕(흔히 일컫는 계일왕, 606∼647)이 계속하여 절을 짓고 승방을 중수한 것들에서부터 기록되어야할 것이다.
그러므로 「날란다」는 서기 5세기로부터 12세기에 이르는 약7백년 동안, 불교를 연구하는 대학원으로서, 인도 전국에서 가장 웅대한 규모이었고, 또 가장 빛나게 발전해갔던 교육기관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중국을 비롯하여, 신라·일본·「티베트」·「세일론」등 각지로부터 무수한 유학생들이 모여들었던 곳이요, 이곳의 기숙사에는 약1만 명의 학생들이 기숙하고 있었으며, 교수만도 2천명이 넘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더욱이 이곳에서 가르치던 교육과목은 불교만이 아니고, 종교·철학·과학·예술 등 학문의 전 분야에 걸쳐서 교육했던 것이니, 그 규모와 이상이 얼마나 컸던 줄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던 곳이 12세기에 「이슬람」군대의 손에 여지없이 파괴된 채 내버려두었더니 1915년이래 수십 년에 걸쳐, 인도정부의 고적조사단들이 발굴해내어, 이곳의 유적들을 정리해 놓게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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