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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김정일 후계자 거론 … 결국 처조카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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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북한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평양에서 지난 8월 1일 ‘2013년 동아시안컵 축구대회’에서 우승한 여자 축구선수들을 격려한 뒤 양궁경기를 관람하고 있다. 왼쪽부터 최용해 인민군 총정치국장, 김 위원장, 장성택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대남 비서), 김경희 노동당 비서. [로이터=뉴스1]

장성택 국방위 부위원장은 지난달 6일 이후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감췄다. 조(북한)·일 대학생 친선 농구대회를 관람하기 전 일본 대표단과 함께 온 이노키 간지 참의원과 만난 게 마지막 모습이다. 한 달 가까운 공백이 이어졌지만 누구도 그의 신변에 이상이 생겼다거나 이상징후라고 여기지 않았다. 그만큼 김정은 체제 들어 2년 동안 그는 가장 잘나가는 인물이었다. 그런 장성택이 어쩌면 권력 실세로서의 생명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지 모를 운명에 처했다. 측근들이 공개처형당하고, 장성택은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북한 권력 내에서 오랫동안 ‘장 부장’이란 별칭으로 불려온 그는 한때 김정일의 권력 후계자로 꼽힐 정도였다. 김정일의 세 아들이 모두 후보군에 오르지 못했을 때 장성택 대안설이 군부 등에 의한 집단지도체제 가능성과 함께 힘을 얻었다. 군 고위 장성이던 형 장성우와 장성길이 2009년과 2006년 각각 숨지자 음모설까지 나왔다. 하지만 2008년 여름 뇌졸중으로 쓰러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부자승계로 구도를 굳히고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낙점하면서 장성택은 후견그룹으로 분류됐다.

 꼭 2년 전 김정일의 급작스러운 사망은 장성택에게 기회였다. 늘 김정일의 그늘에 가려 2인자에 머물러야 했던 그는 부인 김경희(노동당 비서)와 함께 어린 처조카 김정은의 후견 역할을 하며 후견인으로서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수첩을 들고 꼼꼼히 메모를 하고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있던 김정일 때와는 훨씬 자유로워진 모습은 이를 알 수 있게 했다.

 장성택의 출신성분은 베일에 싸여 있다. 국정원 인물파일에도 오랫동안 강원도 출생으로 올라 있었지만 몇 해 전에야 ‘1946년 함북 청진’ 출신으로 바로잡혔다. 장성택은 72년 김일성의 장녀 김경희와 결혼했지만 과정이 순탄치는 않았다. 당시 김일성종합대 학생이던 장성택은 김일성이 김경희와 사귀는 걸 반대하는 바람에 원산경제대학으로 출학(전학)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그를 만나기 위해 원산을 오가던 김경희가 몸져 눕자 김정일이 나서 도왔고 마침내 장성택은 로열패밀리 대열에 합류하게 된다.

 장성택은 평양시 당위원회 지도원으로 시작해 당 조직지도부 외교부 담당, 당원등록과장을 거치며 실무를 익혔다. 당 청소년사업부 부부장(82년), 당 청소년사업부 제1부부장(85년), 당 청소년사업부 부장(88년), 청년 및 3대혁명소조부장(89년),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95년), 수도건설위원회 및 당 행정부장(2008년) 등 그의 이력은 화려하다.

 2002년엔 경제시찰단 일원으로 방한, 서울과 경주·제주 등지를 둘러보기도 했다. 당시 그를 만났던 통일부 당국자는 “장성택은 상당히 개방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며 “북한 안에 그를 추종하는 인물들이 많아 그의 목소리가 커지면 경제적으로 북한의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곡절도 많았다. 70년대 초반 장성택이 주도해 건설했던 체육관이 개관 전날 화재로 전소하는 사건이 발생하자 사생활 문제 등을 이유로 지방으로 좌천됐다. 90년대 청소년사업부장 시절에도 사생활 문제로 실각, 당에서 운영하는 협동농장에서 노동을 해야 했다. 하지만 절치부심 끝에 그는 ‘당 속의 당’이라 불리는 노동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

 그러나 2004년 그에겐 또다시 시련이 닥쳤다. 그해 2월 당 고위 간부 자제의 결혼식이 발단이었다. 결혼식에 참석했던 한 간부의 운전기사가 음주운전 사고를 내 사고경위를 조사하던 중 이 결혼식이 호화롭게 진행된 사실과 최용수(인민보안상) 등 고위 간부들이 장성택에게 줄을 섰던 게 드러나 김정일 위원장의 노여움을 샀다. 2006년 복귀했지만 외동딸 금송이 프랑스에서 자살하는 아픔을 겪는다.

 이후 장성택은 평양시 현대화를 책임지며 입지가 강화됐다. 김정일 사망 이후 당 정치국 위원, 인민군 대장, 당 중앙군사위원 등 핵심 요직을 맡으면서부터는 “고모부가 조카를 앞세워 섭정을 하는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왔다.

정용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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