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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와 포퓰리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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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병상 기자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오병상
수석논설위원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체제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최근 정치판을 보며 새삼 가슴에 와 닿는 명언이다. 처칠이 1947년 의회연설에서 한 말이다. 당시 처칠의 처지를 알면 더 공감이 간다. 제2차 세계대전을 막 승리로 이끈 영웅 처칠은 드높은 인기에도 불구하고 총선에 패배해 정권을 빼앗겼다. 나라를 구한 사람에게 패배를 안겨준 민주주의라면 ‘최악’이라 불러 마땅하다.

 문장이 여기서 끝난다면 그저 푸념에 불과했을 것이다. 처칠의 위대함은 이어지는 단서조항이다. “지금까지 시도됐던 다른 정치체제를 모두 제외한다면(except for all those other forms that have been tried).” 민주주의가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지만, 왕정이나 귀족정 혹은 파시즘과 같은 다른 정치체제보다는 낫다는 의미다. 절묘한 반어법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강조했다.

 그런데 보통 사람들은 민주주의의 문제점만 크게 느낀다. 아무리 선진국이라 해도 유권자들의 절대다수는 ‘정치 수준이 낮다’고 개탄하며, 늘 ‘정치인은 믿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도 압축성장해 온 우리나라에서 정치불신은 그만큼 더 심각하다. 그 증거가 안철수 현상이다.

 당연히 안철수에 대한 기대의 핵심은 ‘정치쇄신’이다. 그래서 그가 ‘구체적인 정치쇄신 방안을 제시하겠다’고 예고했던 지난 23일 인하대 강연은 특히 주목을 끌었다. 현장취재기자가 보내 온 메모를 보고 깜짝 놀랐다. 동영상 화면을 찾아 다시 확인했다. 더 놀랐다.

 메모를 보고 놀란 까닭은 쇄신 방안의 내용이 단편적이고 논리가 일방적이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국회의원 수를 200명으로 줄이자며 비교한 사례가 미국과 일본이다. 비교가 안 되는 나라와 비교했다. 미국은 연방제이고, 일본은 양원제다. OECD 평균으로 따지면 우리나라 국회의원은 350명 정도로 더 늘려야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누구도 ‘늘리자’고 나서지 못하는 것은 국민적 정치 불신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며 더 놀란 것은 현장 분위기다. 안 후보는 “법 못 만든 게 국회의원 수가 모자라서인가” “지난 몇 년간 뭘 하신 거죠”라는 식의 비꼬는 투로 객석에 물었고, 대학생 청중들은 환호하며 박수 쳤다. 국회의원 수 줄이고 국고지원 줄이고 중앙당 없애고, 대신 그 비용을 청년실업 해소에 쓰겠다는데 누가 반갑지 않겠는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고, 논리적으로 맞지 않지만 마음에 든다. 포퓰리즘이다.

 안 후보가 제시한 쇄신 공약이 사실은 모두 정치불신에 기반한 것이고, 그 공약을 전달하는 형식 역시 정치불신이란 대중정서를 자극하는 모양새였다. 그러다 보니 사방에서 비판이 몰아쳤다. ‘포퓰리즘’이란 지적에 대해 안 후보는 ‘국민에 대한 폄훼’ ‘정치 기득권의 저항’으로 반박했다. 최강의 받아치기다. 안 후보가 강수를 거듭할 수 있는 것은 여론의 뒷받침이 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 결과 60% 이상이 ‘국회의원 수 줄이기’에 찬성했다. 정치불신이란 사회적 분위기로 볼 때 당연하다. 그렇다고 ‘여론이 틀렸다’고 정면 반박할 강심장 정치인은 없다. 포퓰리즘의 힘이다.

 민주주의의 급소는 바로 이런 포퓰리즘이다. 포퓰리즘의 문제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정치학의 숙제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딜레마의 연속이다. 다수의 지배가 원칙이지만, 다수의 독재가 되면 중우(衆愚)정치다. 정치인의 입장에선, 유권자를 대변해야 하지만 따라가기만 해선 대중 추수(追隨)주의로 길을 잃게 된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명언처럼 정치인은 ‘서생(書生)적 문제의식’도 있어야 하지만 ‘상인(商人)적 현실감각’도 있어야 한다. 포퓰리즘은 상인적 현실감각에 속하며, 대중 추수주의 행태를 보일 경우 중우정치가 된다. 다수가 열광하는 포퓰리즘은 정치적으로 극단적 쏠림현상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기에 특히 위험하다.

 안 후보는 이런 비판을 이미 예상한 듯하다. 인하대 강연의 마무리 발언으로 ‘민주주의 아버지 존 로크의 말’을 소개했다. ‘새로운 의견은 아직 일반적이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언제나 의심받고 대부분 반대에 부딪힌다’. 맞는 말이다. 안 후보는 이처럼 멋있는 인용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로크의 사상에 비유한 셈이다.

 그런데 전후 맥락이 빠졌다. 로크는 정치인이 아니라 철학자였으며, 로크의 주장이 구현되기까지엔 프랑스 대혁명 같은 세기적 사건과 300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안 후보는 시대를 관철하는 사상가도 아니며, 역사를 건너뛸 수 있는 메시아도 아니다. 정치 신인 안철수는 유권자들에게 더 많은 설명을 해야 한다. 왜 포퓰리스트가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