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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는 20시간 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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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후남
문화스포츠부문 차장

사자를 만났다. 최근 직항이 생기면서 크게 가까워진 아프리카 케냐, 그중에도 마사이마라 국립공원에서다. 현지인 가이드는 저 멀리 언덕을 가리켰다. 보일 듯 말 듯 네 개의 누런 점이 움직인다. 사륜구동 차량이 이리저리 굽이를 돌아 접근하는 사이 점들은 사라진다. 대신 네 마리 사자가 눈앞에 나타났다.

 초원의 왕자들은 느긋했다. 차가 다가가도,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가던 걸음을 서두르는 기색이 없다. 그중 한 마리는 아예 풀밭을 빠져나와 차량 바로 앞을 걷는다. 참 초연하다.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맹수가 아니라 시골길을 걷는 누렁이 같다. 포효하는 대신 가끔 초원을 돌아보며 꼬리를 말아 올린다.

 사자가 늘 무섭고 포악한 건 아니다. 현지인에게 듣자니 사자는 배가 부르면 사냥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잠을 하루 20시간쯤 잔단다. 실제로 얼마 뒤 낮잠에 빠진 사자도 만났다. 사자에겐 당연한 습성이다. 인간에겐 놀랍다. 인간이란 동물은 오늘 배가 불러도 내일이 걱정이다. 내일만 걱정해도 양반이다. 당장은 먹을 게 있어도 내년이, 후년이, 은퇴 이후가, 자식이 걱정이다. 어쩌면 곳간에 뭔가 있을수록 불안하다. 세계화 시대에는 더욱 그렇다. 잠든 사이 지구 반대편에서 또 무슨 금융위기, 경제위기가 쓰나미로 몰려와 곳간을 거덜낼지 모른다. 기업도 마찬가지다. 현재 천문학적 수익을 내도, 국내 시장에서 암만 잘나가도 국제경쟁력이, 미래 성장동력이 고민이자 화두다.

 사자가 인간 같지 않아 초원은 다행이다. 사자가 배불러도 먹이를 탐한다면, 그래서 24시간 눈에 불을 켜고 사냥에 나선다면 초원에 다른 동물이 남아나지 않을 터다. 이렇게 되면 사자의 생존 역시 위협받는다. 널리 알려진 대로 사자에게 가장 큰 위협은 인간이다. 아프리카에서도 검은코뿔소는 뿔을 노린 밀렵 때문에 멸종위기라고 한다.

 케냐 여정 말미에 수도 나이로비로 돌아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는 퍽 한갓지게 보였던 도시다. 암만 ‘동물의 왕국’ 운운하는 케냐지만 도시 안에 황새만 한 검은 새 말라부가 날아다녀 깜짝 놀랐었다. 다시 보니 꽤 북적인다. 서울 같은 불야성은 아니어도 조명 밝힌 대형 광고판이 눈에 들어온다. ‘24시간 영업’을 자랑하는 대형마트 광고다. ‘외계인을 위한 지구 사파리’ 가이드북은 인간이라는 동물을 이렇게 소개할 것 같다. 8시간쯤을 자는 게 정상이다. 그런데도 24시간 먹이를 찾는다. 아니 찾아야 하는 형편이다.

 사자가 아주 머나먼 데 사는 건 아니다. 인천공항에서 나이로비까지 13시간 걸렸다. 뉴욕까지의 비행시간보다 짧다. 지구는 한 방향으로 돈다. 인간은 반대 방향으로도 얼마든 갈 수 있다. 이제껏 걸어온 도시화, 산업화, 세계화 같은 길만이 앞으로도 가야 할 길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인간이라는 동물도 동물답게 살았으면 싶다. 그런 길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