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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절 아침 청년들에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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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교수·정치학

3·1절 새벽, 아직 동이 트기 전 여명에 청년들과의 대화주제를 묵상해본다. 내게 3·1절의 의미는 늘 ‘청년정신’ ‘희망’ ‘전체’ ‘보편’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성세대의 무지와 탐욕으로 너무도 힘든 삶을 사는 오늘의 청년들을 보며 3·1정신을 떠올리는 연유다.

 부를 때마다 ‘3·1절 노래’는 우리에게 상실과 충일(充溢), 장엄과 발랄, 숙연과 희망을 함께 갖게 하는 이중의 감정체계로 다가온다.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이렇듯 ‘물밀 같은’ 설렘과 ‘터질 듯한’ 희망으로 노래할 수 있었는지 그 배포와 미래지향이 놀랍다. 모든 것을 잃었던 절대 절망이 오직 희망만을 노래하게 했기 때문일 게다. 절망의 희망 창조 역할을 말한다. 즉 고난이 크다면 희망 역시 그만큼 크게 가지면 된다.

 3·1정신을 아로 새긴 ‘기미독립선언서’의 골간정신은 놀라움을 넘어 충격적이기까지 하다. 제국주의와 식민주의가 세계를 휩쓸던 20세기 전반 세계 어느 나라, 어느 민족의 독립선언들, 투쟁선언들과 비교해도 민족주의적이기보다는 보편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기보다는 세계지향적이며, 확고하게 평화·평등·인도·사해동포주의를 견지했기 때문이다. ‘식민’ 상황에서도 ‘세계’와 ‘인류’와 ‘보편’을 앞세우는 가당치도 않을 법한 국량과 기상은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과거로는 전체와 보편을 정확히 인식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했던 지정학 때문이었겠고, 미래로는 다가올 시대의 세계성과 국제성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3·1절의 상징 ‘유관순’을 떠올리면 우리는 두 가지를 깊이 상념하게 된다. 먼저, 기성세대의 오류와 실패는 공동체의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도 있다는 점이다. 공동체의 전체 상황은 개개인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유관순이 너무도 젊다는 점이다. 3·1절 시위에 참여하고 고향 아우내 시위를 주도했을 당시 그는 만 17세도 되지 않았다. 옥중투쟁과 고문 끝에 옥사했을 당시엔 만 18세도 안 되었을 때였다. 수많은 유관순들의 참여 없이도 3·1정신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 기성세대들이 청년들의 현실참여에 대해 “애들이 뭘 알아”라는 비판이 과연 정당한 것인가? 청년들은 기성세대가 만들어놓은 현실문제들의 직접적 이해 당사자들이지 않은가? 그들에게 현실은 곧 자기문제인 것이다.

 강조컨대 전체 사회구조야말로 청년들의 미래에 직접 영향을 끼친다. 오늘의 등록금, 비정규직, 청년실업, 고용 없는 성장, 자영업 도산, 공격적 사회체계와 학교폭력, (사회의) 게임산업 발전과 (청소년의) 게임중독 등은 한 사람, 한 청년, 한 가족의 삶, 정신, 미래가 사회의 전체구조와 결코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이를 ‘각자’ 사교육을 시키거나, ‘모든’ 청년들이 개인적으로 스펙을 쌓는다고 그들 모두가 성공하며 좋은 삶이 가능할 것인가? 오늘의 육아·교육·복지·경제 체제를 볼 때, 사회구조가 좋지 않을 때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좋은 삶과 행복을 누릴 수 있을까? 기성세대들이 자기 자녀와 다른 청년들의 미래를 위해 좋은 사회구조를 만들고 물려주어야 할 필연적 이유인 것이다.

 청년들 역시 전체와 보편에 반드시 눈을 떠야 한다. 나의 문제가 남의 문제이고, 남의 문제가 나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나와 남의 문제라는 것은 곧 우리 전체의 문제라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준비는 언제나 사회비전과 자기연마 두 가지다. 우리는 전체에 눈을 뜰 때 비로소 자기 삶의 궁극적 의미와 목적을 깨닫는다. 타인 사랑 및 연대를 말한다.

 내가 남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것이야말로 나와 남의 문제, 즉 전체 문제를 ‘함께’ 해결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타인 사랑은 곧 자기 사랑인 것이다. 이기심이 아니라 거꾸로 연대성이야말로 자기애인 것이다. 타인들을 더 많이 더 깊게 사랑한 영혼들이 자기 삶을 더 뜨겁게 살고, 공동체와 인류에 더 큰 발자국을 남겼음은 이런 이유 때문이다. 특히 나보다 더 고통스러운 수많은 남(들)의 삶과 영혼을 살리려 소금 역할을 하려는 사람에게 자기의 고난은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고난을 극복한 희망의 증거가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남에게 희망을 줄 수 있겠는가?

 타인과 전체에 눈을 뜨는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내 삶의 지평이 탄탄하게 자리를 잡는, ‘영혼의 떨림’ ‘영적 각성’을 경험하게 된다. 고통에 직면한 오늘의 청년들이 그러한 ‘영혼의 떨림’을 통해 나와 남을 함께 사랑하고, 나와 전체를 바르게 바꾸는 ‘참된 청년정신’을 갖는, 그리하여 타인과 세계에 ‘희망의 증거’가 되는 3·1절 아침이 되길 소망한다.

박명림 연세대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