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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판 뒤엎는 폭로 ‘한 방’ … 어디로 튈지는 아무도 몰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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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3호 08면

‘한 방의 폭로’가 한국 정치를 뒤흔든다. “전당대회에서 돈봉투가 돌았다”는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의 한마디에 정치권 전체가 요동치고 있다.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한나라당은 패닉 상태다. 민주통합당도 수사의 불똥이 튈까 숨을 죽인다. 돈봉투 폭로는 한나라당 안에서 친이명박계와 친박근혜계 간의 계파 갈등으로 발전하면서 총선을 앞두고 양측 간 헤게모니 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이제 정국이 어디로 향할지 누구도 예측하기 힘든 국면이다.

폭로에 요동치는 한국 정치

폭로는 한국 정치에서 ‘결정적 한 방’으로 자주 작용했다. 대형 폭로 한 번에 전직 대통령이 구속되고, 권력 실세가 무너진다. 하지만 폭로는 최초 조준점을 벗어나 의외의 방향으로 번질 수 있다. 옷로비 의혹사건처럼 정권에 생채기를 냈지만 실체가 없는 초대형 픽션으로 끝나기도 했다. 여기엔 폭로의 숨은 코드가 작용한다.

#1 권력 심장 겨누는 약자의 무기
1995년 10월 19일 오후 국회 본회의장. 제2야당 민주당의 초선 의원 박계동이 나른한 회의장을 뒤흔든다. “전직 대통령 4000억원 비자금의 실체는 이것이 증거입니다. 신한은행 예금계좌번호 302-38-001672입니다.” 온 나라가 발칵 뒤집혔다. 한 달 만에 노태우 전 대통령이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됐다. 곧 이어 김영삼(YS) 정부는 5ㆍ18 특별법을 제정했고, 이듬해 1월 전두환 전 대통령까지 내란죄 등으로 구속됐다. 당시 44세였던 박 의원은 여당도 제1야당도 아니었다. 정계의 중진이나 실세는 더욱 아니었다. 경기대 이준한(정치학) 교수는 “정치적 약자가 예상을 뒤집고 권력의 심장을 겨냥할 때 폭로의 파괴력은 더욱 크다”고 설명했다. YS 정부 마지막 해인 96년을 요동치게 만든 의사 박경식씨의 폭로도 ‘소통령’으로 군림하던 대통령 아들의 권력 남용을 건드리자 파괴력이 컸다. 이 폭로로 김현철씨는 구속된다.

#2 내부자 폭로가 파괴력 크다
폭로의 파괴력은 침묵의 공조가 깨지는 대목에서 극적으로 증폭된다. 김대중(DJ) 대통령의 3남 홍걸씨의 구속으로 이어진 2002년 ‘최규선 게이트’의 출발은 최씨의 운전기사이자 측근이던 천호영씨였다. 천씨가 그해 3월 28일 경실련ㆍ한나라당 홈페이지에 “최씨가 홍걸씨를 등에 업고 이권에 개입한다”고 폭로하면서다. 한나라당을 넘어 한국 정당정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돈봉투 파문’ 역시 그렇다. 당사자인 고 의원이 “의원실에 배달된 돈봉투를 돌려줬다”고 자기고백적 내용을 털어놓자 불길이 확산됐다. 2004년 2월 당시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이 제기한 ‘노무현 대통령 1300억원 당선 축하금 수수 의혹’은 의혹 제기로 끝났다. 내부자가 아니어서 구체적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여론은 정치 공세로 간주했다. 충남대 전우영(사회심리학) 교수는 “폭로는 여론이 진실이라고 믿을 때 파급력이 커진다”고 말했다. 내부자 폭로가 더 파괴력이 있는 이유다.

#3 사생활 나오면 관심 증폭
99년 DJ 정부의 옷로비 의혹사건은 TV 드라마를 능가했다. 등장인물이 고관대작 부인들의 사생활이어서다. 현직이던 김태정 검찰총장의 부인 연정희씨,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부인 이형자씨,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부인 배정숙씨 등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다. 세 사람이 상류층을 상대하는 앙드레 김 의상실과 여성의류 매장 ‘라스포사’에 함께 드나들었고, 구명 로비용으로 쓰인 옷이 라스포사의 호피무늬 코트란 주장이 나오자 비난은 최고조에 달했다.

전당대회 돈봉투 의혹 파문 한나라당 고승덕 의원이 ‘돈봉투’ 의혹의 진원지로 주장한 박희태 국회의장이 지난 8일 일본 등 4개국 방문을 위해 김포공항에서 출국하고 있다. 김형수 기자

이 사건 뒤 “밝혀진 것은 앙드레 김의 본명은 김봉남뿐”이란 자조와 함께 옷로비 공방은 ‘실체 없는 의혹’으로 끝났다. 하지만 검찰 수사, 국정조사 청문회, 특검까지 이어지며 DJ 정부의 국정 장악력은 깊은 상처를 받았다. 2000년 5월 경쟁자의 폭로로 시작된 로비스트 린다 김의 ‘YS 정부 고위인사 로비 의혹사건’도 연서(戀書) 몇 장이 기폭제 역할을 하며 일파만파로 번졌다. 이양호 전 국방부 장관, 금진호 전 상공부 장관 등이 린다 김과 주고받은 편지가 공개되자 편지에 나온 ‘샌타바버라 바닷가의 추억’은 장안의 화제가 됐다. 명지대 김도종(정치심리학) 교수는 “숨겨졌던 권력의 사생활을 드러낼 때 여론은 대리만족을 느끼며 폭로의 파장이 더욱 확대된다”고 말했다.

#4 엉뚱한 결과 비일비재
폭로는 일단 공개되면 스스로 굴러간다. 당초 의도와 전혀 다르게 상황이 전개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95년 박계동 의원이 터뜨린 ‘노태우 비자금’의 충격파는 예상치 못했던 DJ의 고백을 불렀다. 박 의원 폭로 18일 후 DJ는 “노 전 대통령에게서 선거운동 격려와 위로 차원에서 20억원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한 달 전 DJ가 창당한 새정치국민회의는 도덕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국민회의는 결국 다음 해 4월 총선에서 79석에 그치며 참패했다.

2003년 노무현 정부의 대북송금 특검은 2002년 9월 엄호성 의원이 ‘현대의 4000억원 대북 지원설’을 폭로하며 불거졌다. 여론은 남북 정상회담의 대가성 논란으로 들끓었다. 그런데 특검의 계좌추적에선 현대 측의 대북송금 성격만 아니라 ‘150억원 비자금’이 튀어나왔다. 현대 측에서 대북사업 협조 명목으로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박지원 전 문광부 장관이 구속됐다. 돈을 조성한 당사자로 지목된 정몽헌 현대아산 회장은 투신 자살하며 충격을 줬다.

#5 음모론으로 반격하는 게 정석
‘돈봉투’ 폭로로 쑥대밭이 된 한나라당에선 ‘음모론’이 무성하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친이계 죽이기’라는 의혹이다. 과거에도 폭로가 있을 때마다 음모론이 등장했다. 96년 김현철씨 구속 때도 ‘의사 박경식씨가 의료업체와 고소전을 벌이다 현철씨에게 도움을 청했으나 거절당하자 앙심을 품고 폭로에 나섰다’는 음모론이 나왔다. 하지만 여론을 덮지 못했다. 97년 10월 7일 강삼재 신한국당 사무총장의 ‘DJ 비자금 내역’ 폭로에선 결과적으로 음모론이 힘을 얻은 경우다. 당시 DJ 측은 “대선을 두 달 앞두고 이회창 후보 측이 공작 정치에 나섰다”(이강래 민주통합당 의원)며 반발했다.

그 직후 DJ가 YS를 청와대에서 만나 ‘선거 중립’을 약속받은 데 이어, 김태정 검찰총장까지 ‘수사 유보’를 결정하며 DJ 비자금 폭로는 대선 변수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강 총장이 DJ 정부 출범 후인 2001년 ‘안풍’ 사건(안기부 예산의 신한국당 지원 의혹 사건)에 연루되며 2003년 1월 정계를 은퇴하는 역풍을 맞았다.

정치 폭로엔 크든 작든 명암이 있다. 고려대 이내영(정치학) 교수는 “폭로는 정치권의 치부를 만천하에 드러내고 이를 개선하는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일단 순기능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고 의원의 폭로에 대해 한나라당에선 ‘당을 망치려 하나’는 불만이 나오겠지만 선거법의 사각지대였던 여야 전당대회의 고비용 정치 구조를 바꾸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폭로 의존형으로 치닫는 한국 정치에 대해선 우려의 목소리가 크다. 명지대 김형준(정치학) 교수는 “폭로에 맛들이는 정치 풍토가 계속되면 ‘막장 정치’ ‘네거티브 정치’로 가게 돼 유권자들에겐 정치에서의 ‘충동구매’에 익숙하게 만드는 악영향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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