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권 주겠다” 임실군수, 브로커에게 ‘노예각서’ 써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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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강완묵 임실군수(左), 김진억 전 군수(右)

민선 출범 이후 역대 단체장들이 줄줄이 사법처리를 당한 전북 임실에서 군수들이 “인사권·공사권을 주겠다”는 각서를 선거 브로커에게 써준 것으로 드러났다. 지방선거에서 표를 얻기 위해 인사권을 판다는 ‘검은 거래’ 소문이 사실로 확인된 것이다.

 강완묵(52) 임실군수는 28일 “2007년 10월 선거 브로커 권모씨에게 ‘권씨를 비서실장에 임명하고 인사권·사업권 등을 일정 부분 위임한다’는 내용이 적힌 각서를 써줬다”고 말했다. 강 군수는 지역에서 각서 관련된 소문과 의혹이 증폭되자 이 같은 사실을 밝혔다.

 농민운동가 출신인 강 군수는 당시 임실군수(김진억)가 뇌물수수 혐의로 구속돼 2008년 보궐선거를 실시할 경우 출마할 예정이었다. 강 군수는 “민주당 공천에서 탈락하는 등 이전 선거에서 몇 차례 고배를 마시다 보니 절박한 심정이었고, 권씨가 실제 표로 직결될 수 있는 조직을 관리하는 등 영향력을 가지고 있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각서를 써줬다”고 털어놨다.

 또 다른 출마 예정자였던 심모씨 역시 브로커 권씨에게 각서를 써 줬다. 각서에는 ‘임실군수 보궐선거를 실시해 군수로 당선되면 권모씨에게 비서실장 자리를 보장해주고 임실군청 공무원 인사권 40%, 사업권 40%를 위임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심씨는 “지역 내 탄탄한 조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브로커 권씨와 대립각을 세울 필요가 없어 각서를 써 줬다”고 말했다.

 이에 앞서 2004년 브로커 권씨는 김진억 전 군수에게 2억원짜리 어음 지불 각서를 써주고 발목을 잡았다. 권씨가 작성한 각서에는 ‘하수처리장 공사를 위임하면 2억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실제 임실군은 2005년 오수 하수종말처리장 공사를 권씨의 부인이 사장으로 있는 회사에 맡겼다.

 이 어음 지불 각서 문제가 불거지면서 김 전 군수는 2007년 구속됐다. 하지만 2008년 7월 대법원은 “주요 증인들이 법정에서 진술을 번복하는 등 증거의 신뢰성이 부족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이로 인해 심씨와 강완묵 후보가 출마를 노렸던 2008년 임실군수 보궐선거는 무산됐다. 브로커 권씨는 이에 대해 “이 같은 각서를 요구한 적도 없고 본적도 없으며, 누군가 고의적으로 각서를 조작한 것”이라고 반박했다.

 권씨 등 선거 브로커들이 활개치고 학연·지연 등이 얽히면서 임실군에서는 지금까지 군수 3명이 잇따라 사법처리를 당해 ‘임실은 군수들의 무덤’이라는 얘기까지 나돈다.

 1995년 민선 첫 군수로 뽑힌 이형로(75)씨는 2000년 11월 쓰레기매립장 부지 조성과 관련해 건설업체의 부탁을 받고 서류를 임의로 꾸며준 혐의로 1심에서 500만원 벌금형을 선고받고 중도 하차했다. 이후 이씨는 대법원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두 번째 군수였던 이철규(71)씨는 2003년 8월 사무관 승진 청탁과 함께 9000여만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이씨의 낙마로 보궐선거를 통해 당선된 김진억(70) 전 군수는 현재 수감 중이다. 상수도 확장 공사와 관련해 수의 계약을 주는 대가로 건설업자로부터 5000만원을 받은 혐의로 2008년 8월 구속됐다.

 강 군수는 지난해 6·2 지방선거를 앞두고 측근을 통해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한 혐의로 기소됐다. 강 군수는 지난 8일 1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8400만원을 선고받았으며 현재 항소 중이다.

전주=장대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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