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리싼 가는 곳엔 화약 냄새뿐 … 저우도 책상 치며 비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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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4호 29면

리리싼은 모스크바 억류 기간에 15세 연하의 러시아 여인과 네 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리사(李莎)라는 중국 이름을 지어줬다. [김명호 제공]

1922년 9월, 리리싼(李立三·이립삼)이 류사오치(劉少奇·유소기)와 함께 주도한 안위안(安源) 탄광 파업은 중공당원 확충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파업 2년 후인 1924년 말, 전체 중공당원 900명 중 300여 명이 안위안 탄광 출신이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3>

전 중국을 경악시킨 파업이다 보니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겼다. 그중 하나가 프랑스의 근공검학생들 사이에 퍼진 리리싼 사망설이었다. “노동운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분을 삭이지 못한 리리싼이 지역 군벌을 암살하려다 체포됐다. 요참(腰斬)으로 세상을 떠났다.” 리리싼의 성격과 딱 맞는 소문이었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와 자오스옌(趙世炎·조세염)은 파리 교외에서 추도식을 열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이 편집하던 소년공산당 기관지도 “사실이 아니길 바라지만 상대가 리리싼이다 보니 믿을 수밖에 없다. 동지들은 경건한 마음으로 애도를 표해주기 바란다”며 특집을 발행했다. 리리싼 생전에 거행된 추도회와 추모특집이었다.

얼마 후 리리싼이 무사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저우언라이와 덩샤오핑은 추모 사실을 리리싼에게 절대 비밀로 하라고 유학생들에게 신신당부했다.

1926년, 리리싼은 중국 최대의 조선창(造船廠)이 있는 후베이(湖北)성 우한(武漢)으로 활동무대를 옮겼다. 이곳 노동운동 지도자는 코민테른이 지명한 조선공 출신 샹중파(向忠發·향충발)였지만 실권이 없었다. 우창(武昌)·한양(漢陽)·한커우(漢口)·우한싼전(武漢三鎭)의 30만 노동자는 리리싼이 나오라면 나오고 들어가라면 들어갔다. 리리싼은 자신이 넘쳤다. 군대를 장악한 장제스가 돌변하리라고는 예상도 못했다.

장제스의 정변으로 중공은 몰락의 위기에 처했다. 당시의 상황은 마오쩌둥조차 “뭘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고 훗날 술회할 정도였다. 리리싼은 “무장으로 무장을 제압해야 한다. 중국 혁명은 발로 한번만 걷어차도 성공할 단계에 이르렀다”며 대도시에서 노동계급이 주도하는 무장폭동을 주장했다. 농촌에 근거지를 마련해야 한다는 마오쩌둥의 주장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농촌은 통치계급의 사지(四肢)에 불과하다. 도시야말로 저들의 두뇌이며 심장이다. 사지를 절단내더라도 두뇌와 심장을 날려 버리지 않으면 숨통을 끊는 것은 불가능하다.” 농민과 노동자를 따로 무장시키자는 마오쩌둥의 공농무장할거론(工農武裝割居論)도 기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당권을 장악한 리리싼은 가는 곳마다 폭동을 주도하며 화약 냄새를 풍기고 다녔다. 소련의 미적지근한 정책도 맘에 들지 않았다. “소련은 적극적으로 전쟁을 준비해야 한다. 몽골에서 손을 떼고 중국을 지원해라. 우리는 적을 향해 총공세를 퍼부을 준비가 되어있다”면서 열을 올렸다. 조급증과 극좌노선의 절정이었다. 여간해선 얼굴을 붉힌 적이 없는 저우언라이조차 주먹으로 책상을 칠 정도였다.

코민테른과 소련은 중공 중앙당에 지원하던 자금을 동결시켰다. 중공 창당 이래 코민테른이 가한 가장 강력한 제재였다. 자금줄이 막힌 리리싼은 무대에서 내려오는 수밖에 없었다.

리리싼의 퇴장과 모스크바 소환을 지켜본 마오쩌둥은 머리가 맑아졌다. 정당이나 사회단체의 운명이 지도자의 의지나 객관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정치적이나 군사적인 투쟁 경험이 성숙될수록 경제적으로 의지할 곳을 찾아야 한다는 확신이 섰다. “중국에서 가장 똑똑하고 정치적인 집단은 농민이다. 수천 년 동안 그친 적이 없는 농민 반란은 그들의 정치적 표현 중 하나였다. 도시 노동자들은 뿌리가 약하다.”

리리싼이 중국을 떠나자 두 딸을 데리고 이곳저곳을 전전하며 감옥 구경까지 한 리충산(李崇善·이숭선)은 갈 곳이 없었다. 중공 지하조직도 당에 손실을 끼친 리리싼의 부인을 냉대했다.

살길을 찾기 위해 고향으로 갔지만 미친놈의 부인이라며 가는 곳마다 사람 취급을 못 받았다. 황시쒀(黃希索·황희색)라는 청년이 평소 리리싼을 존경했다며 리충산 모녀를 극진히 보살폈다. 건강을 회복한 리충산은 연하의 황시쒀와 가정을 꾸렸다. 혁명이다 정치다 하는 인간들은 더 이상 꼴도 보기 싫었다.

리리싼은 장점이 많은 사람이었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15세 연하의 러시아 소녀 앞에서도 자신의 과오를 순순히 인정할 줄 알았다. “30세 되는 해에 중공 수뇌부에 진입했다. 경험이 부족하고 너무 조급했다. 중국혁명이 하루아침에 성공할 줄 알았다. 모험을 하다 보니 당에 손실을 많이 끼쳤다.”

1945년 일본이 패망하자 중공 중앙당은 “리리싼이 당 중앙위원에 피선됐다”며 소련 측에 리리싼의 귀환을 요청했다.

리리싼이 15년 만에 옌안으로 돌아오자 류사오치가 리리싼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리이춘(李一純·이일순)을 찾아갔다. 리이춘은 세 번째 남편 차이허썬(蔡和森·채화삼)이 사형 당한 후 옌안에 와 있었다. 리리싼과 다시 합치라고 권하자 리이춘은 “나는 긴 세월은 아니지만 천하의 차이허썬과 살던 사람”이라며 거절했다. 류사오치는 리리싼이 러시아 여인과 결혼한 줄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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