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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졸 만화가 예첸위, 중국화 최고 교육기관 이끌다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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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5호 29면

문혁이 끝난 후 한자리에 모인 중앙미술학원 중국화과 교수들. 왼쪽 다섯째(사진 중앙)가 예쳰위. 오른쪽 지팡이 끼고 안경 쓴 사람이 리커란(李可染·이가염). [김명호 제공]

1947년, 국립 베이핑예전(北平藝術專科學校) 교장 쉬페이훙(徐飛鴻·서비홍)은 “인물·화조·삽화·스케치 등 모두가 독특한 풍격(風格)으로 일가를 이루었다”며 중학교밖에 나오지 않은 예쳰위(葉淺予·엽천여)를 교수로 초빙했다. 2년이 지나도록 별 탈이 없었다.1949년 2월 3일, 중국인민해방군의 베이핑 입성식이 열렸다. 베이핑예전은 학생·교수 할 것 없이 거리에 나가 해방군을 환영했다. 음악과 미술을 동원한 예전 교수와 학생들의 활동은 해방군 베이핑시 군관회 주임 예젠잉(葉劍英·엽검영)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기에 충분했다.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44>

예젠잉은 ‘문화기구 접수소조’를 베이핑예전에 상주시켰다. 접수소조는 화베이(華北)대학교 미술대학과 베이핑예전을 합병, 국립미술학원 설립안을 작성했다.
같은 해 11월, 마오쩌둥은 쉬페이훙에게 ‘國立美術學院’이라는 친필 휘호를 보내며 회신을 요구했다. 며칠 후 ‘中央美術學院’이 적합하다는 쉬페이훙의 답신을 받은 마오쩌둥은 쉬페이훙의 의견을 그대로 수용했다.

이듬해 5월 1일 왕푸징(王府井) 거리 초입 골목에 있는 중앙미술학원에서 개교 기념식이 열렸다. 중국 최고를 자랑하게 되는 미술교육기관의 탄생이었다. 4개월 전 초대 교장에 임명된 쉬페이훙이 행사를 주관했다.

설립 초기 중앙미술학원은 국화(國畵)와 유화(油畵)과를 통합시켜 회화(繪畵)과를 만드는 바람에 중국화(中國畵)과가 없었다. 정부의 지시였다.
쉬페이훙은 예쳰위와 함께 중국화과를 만들기 위해 중공 선전부와 국무원 산하에 있던 문화부 사람들을 3년간 설득했다. 1953년 9월, 쉬페이훙은 숙원이었던 중국화과 설립을 몇 개월 앞두고 세상을 떠났다.

중국화과가 신설되자 이번에는 응시자가 별로 없었다. 교수들도 오려고 하지 않았다. 예쳰위가 학과를 맡는 수밖에 없었다.
예쳰위는 스케치(速寫)와 임모(臨摹)를 가장 중요시했다. ‘전통·생활·창조’가 삼위일체를 이루고 ‘임모·사생·창작’이 결합해야 새로운 중국화가 출현할 수 있다고 학생들에게 강조했다.

한동안 예쳰위는 원색적인 비난을 많이 들었다. “송대의 문인화가들이 스케치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치바이스(齊白石·제백석)를 봐라, 스케치가 뭔지 몰라도 그림만 잘 그리더라. 만화가 출신이라 어쩔 수 없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예쳰위는 만화가 출신이었다.
예쳰위는 신해혁명 4년 전인 1907년, 저장(浙江)성 퉁루(桐廬)에서 태어났다. 퉁루는 작은 현(縣)이었지만 푸춘(富春)강과 베이(北)산 사이에 위치한, 원(元)나라 역사상 가장 걸출한 화가였던 창서우(常熟·상숙) 사람 황공망(黃公望)이 82세 때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의 무대였다. 현대 중국화의 비조 중 한 사람인 예쳰위의 고향으로는 안성맞춤이었다.

예쳰위는 중학 시절 수업에 열중하는 교사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다 걸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선생들은 그림만 빼앗고 야단은 치지 않았다. 꾸중은커녕 “내 모습이 정말로 이랬니” 하면서 볼이 빨개지는 여선생들도 있었다.
밖에만 나가면 눈이 휘둥그레졌다. 가로수에 머리 박고 훌쩍대는 친구 누나를 비롯해 깡패, 유랑극단, 부인에게 멱살 잡혀 끌려가는 오입쟁이,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노 젖는 뱃사공, 애들 몇 명 앉혀 놓고 하루 종일 떠들어대는 얘기꾼 등 온갖 군상들을 스케치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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