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리·댄스·성악 … 학생들 미래 열어주는 48개 진로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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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에 나간 실험 대회에서 예선을 통과하지 못했잖아. 이번이 올해 마지막 대회니까 지금부터 주제를 정해 준비해야 해.”(김소민 인천 신현고 교사·과학)

“TV에서 봤는데요. 빵에 고추냉이를 발라놓으니까 1년 동안 부패하지 않더라고요. 고추냉이의 어떤 성분이 방부제 역할을 하는지 그 원리를 밝혀보면 어떨까요?”(정은옥·인천 신현고 2)

지난달 27일 인천 신현고 과학실에 동아리 ‘혜윰’ 회원들이 모였다. 1, 2학년 학생으로 구성된 회원들은 각자 진로 포트폴리오를 꺼내 참여할 만한 체험활동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2년째 혜윰을 이끌고 있는 김 교사가 학생들과 머리를 맞대고 연구 과제를 검토했다.

지난달 27일 인천 신현고 과학실에서 김소민 교사가 실험동아리 ‘혜윰’ 회원들과 진로 상담을 하고 있다. 김 교사는 과학에 관심 있는 학생들의 무학년 진로 학급 담임을 맡고 있다. [김진원 기자]

옥상에서 장 담그고 업체 탐방하기도

신현고는 80여 명의 교사 전원이 무학년 진로 담임 학급을 맡아 운영한다. 이를 중심으로 한 동아리·봉사·방과후 활동도 활발하다. 무학년 진로학급은 총 48개. 교사 1~3명이 한 학급씩 맡아 학생들의 진로 담임으로 활동한다. 진로 관련 수업은 토요일마다 전일제로 이뤄진다. 전교생은 학년 구분 없이 각자의 특기와 적성에 맞춰 영상제작반·치어댄스반·과학반·문화스포츠반·성악반·요리반 등을 선택해 수강한다. 무학년 진로학급당 소규모 동아리도 2~3개씩 따로 있다. 예를 들어 과학반 학생이라도 각자의 성향에 따라 ‘발명반’ ‘화학 연구 동아리 아톰’ ‘창의실험반 혜윰’ 같이 개별적인 동아리 활동에 참여하는 식이다.

2학년 정은옥양은 1학년 때부터 과학반 활동과 동아리 ‘혜윰’ 활동을 병행하면서 포트폴리오 파일만 5권을 만들었다. 정양의 포트폴리오에는 과학 전시회에서의 봉사활동, 학생 과학 실험 대회 수상, 과학 사진 콘테스트 출품작처럼 진로와 관련된 활동이 빼곡히 정리돼 있다. 중학교 때까지 과학에 관심이 있었을 뿐 명확한 꿈이 없었던 정양은 고교 진학 후 기계공학과에 진학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진로 담당 교사와 동아리·봉사 활동을 꾸준히 하면서 정한 진로다. 정양은 “선생님이 내 진로를 거시적인 안목에서 바라보고 틀을 잡아준다”며 “단순한 봉사활동을 하더라도 내 꿈과 연결해 그 의미를 일깨워주기 때문에 혼자 할 때보다 훨씬 가치 있는 결과물이 나온다”고 말했다.

요리 동아리 회원들은 학교 옥상에 장독대를 마련해 간장·된장을 직접 담근다. 바자회를 열어 손수 만든 장을 판매한 수익금은 독거노인 돕기 성금으로 전달했다. 화학 연구 동아리 ‘아톰’은 화장품 성분을 분석하기 위해 대학 교수를 찾아가 조언을 구하고 화장품 제조 업체도 탐방했다. 이러한 열성 덕분에 지난 6월 인천시가 주관한 과학전람회에서 과학고 학생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특상을 수상했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진로 관련 동아리 활동은 대입 실적으로도 이어졌다. 신현고가 지난해 배출한 1회 졸업생 중 상당수가 무학년 진로 담임제를 통해 쌓은 포트폴리오로 목표한 대학에 합격하는 성과를 거뒀다. 이다경(홍익대 디자인 영상학부 1)씨는 “미술 선생님이 무학년 진로 담임 교사가 돼 1학년 때부터 입시를 도와줘 미대에 합격했다”고 말했다. 한양대 컴퓨터공학과에 진학한 양별이씨는 “발명반 활동을 하며 선생님과 대회도 나가보고 재능 기부 같은 봉사 경험을 쌓았던 게 입시에 큰 도움이 됐다”고 얘기했다.

신현고 학생들이 각자의 진로 계획에 맞춰 동아리·봉사활동을 하며 그 결과물로 정리한 포트폴리오.

진로 지도가 가장 효과적인 진학 지도

신현고는 매년 3월 신입생을 대상으로 일주일간 ‘비전 스쿨’도 연다. 김금숙 교무부장은 “고등학교 입학 전까지 자신의 꿈과 진로에 대해 구체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는 학생이 태반”이라고 말했다. 구체적인 진로 활동에 들어가기 앞서 자신의 꿈에 대해 고민해보는 시간을 갖게 하고 직업을 탐색하면서 목표를 정하게 하는 것이다. 신입생들은 비전 스쿨을 마친 뒤 무학년 진로학급과 동아리를 선택한다.

교사들이 진로 지도에 매달리는 이유에 대해 김 부장은 “서울 지역 학생들에 비해 문화·교육 혜택이 상대적으로 적은 학생들이 스스로 미래의 꿈을 펼쳐나가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이어 김 부장은 “지난해 우리 학교의 무학년 진로 담임제가 알려지면서 서울·경기 지역뿐 아니라 제주도에 있는 학교에서도 이 프로그램을 벤치마킹해 보겠다고 찾아왔다”고 전했다.

이 같은 진로 교육은 학생들의 학력 신장에도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김 부장은 “재학생 학부모가 가장 만족하는 부분도 자녀의 성적 향상”이라고 밝혔다. 진로 지도가 학생들에게 확실한 동기 부여가 돼 자기주도학습으로 이어진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신현고의 학력 신장은 전국 학업 성취도 평가에서도 나타났다. 2009년 성취도 평가에서는 보통 학력 이상 비율이 86.76%로 중위권 수준에 그쳤으나, 지난해에는 89.16%로 인천시 118개교 가운데 8위로 뛰어 올랐다. 올해 성취도 평가에서는 97.13%로 뛰어올랐다. 김 부장은 “97%가 넘으면 특목고와 비슷한 수준으로 볼 수 있다”며 “학교 역사가 짧은 것을 감안하면 엄청난 상승세”라고 평했다.

이승복 교장은 “진로에 대한 확신이 서면 성적이 저절로 상승하는 만큼 장기적인 안목에서 보면 진로 지도가 가장 효율적인 진학 지도”라고 강조했다. 

글=박형수 기자
사진=김진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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