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세한 근육이 생명, 도 닦는 마음으로 쇳덩이와 씨름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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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호 13면

뉴질랜드의 밸러리 애덤스가 지난달 29일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 여자 포환던지기 결승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애덤스는 21m24cm를 던져 대회 3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대구=연합뉴스]

‘쭉쭉 빵빵 빼빼 뚱뚱’.
대구세계육상선수권대회에 출전한 선수들의 몸매를 보면 종목을 알 수 있다며 한 일간지가 소개한 기사의 제목이다. 높이뛰기·멀리뛰기 등 도약 종목은 쭉쭉 뻗은 몸매를 과시한다. 폭발적인 스피드를 자랑하는 단거리 선수들은 빵빵하고, 신장이 작고 가벼운 장거리 선수들은 빼빼하다. 그럼 뚱뚱한 선수들은? 투척(던지기) 종목이다.

정영재의 스포츠 오디세이 <16> 4㎏ 쇠공 던지는 그녀들

창·원반·해머·포환으로 나뉘는 투척 종목 중에서도 포환던지기 선수들의 몸매가 가장 우람하다. 남자는 물론이고 여자 선수들도 다리가 통나무 같다. 50~80m를 시원하게 날아가는 다른 종목에 비해 포환은 20m도 못 가서 툭 떨어진다. 그래서 인기도 관심도 적은 게 포환던지기다. 이신바예바(장대높이뛰기), 클리시나(멀리뛰기) 등 ‘필드의 모델’들이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경기장 한 귀퉁이에서 괴성을 지르며 무거운 쇠공을 던지는 그녀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들이 모르는 그들만의 재미와 보람, 애환은 무엇일까. 이런 생각에 잠기며 스포츠 오디세이는 대구행 KTX에 몸을 실었다.

지난달 29일 저녁 도착한 대구스타디움에서는 남자 장대높이뛰기와 해머던지기, 여자 100m 예선이 열리고 있었다. 장대높이뛰기 선수들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환호와 탄성이 교차했다. 남자 해머던지기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 무로후시(일본)가 포효했다. 입상자들은 각자 국기를 몸에 두르고 400m 트랙을 한 바퀴 돌았다. 잠시 후 여자 포환던지기 결승이 시작됐다. 13명이 출전해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쇠공을 던졌다. 하지만 그들에게 반응하는 관중은 별로 없었다. 마오리 전사를 닮은 뉴질랜드의 밸러리 애덤스가 마지막 시기에 21m24㎝를 던져 대회타이기록을 세웠다. 애덤스가 대회 3연속 우승을 차지하는 순간 수십 대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하지만 애덤스는 우승 세리머니도 마음껏 하지 못했다. 곧바로 열린 여자 100m 결승으로 사람들의 관심과 TV 카메라가 돌아섰기 때문이었다.

포환던지기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 병사들의 돌 던지기, 17세기 영국군의 뇌관을 뺀 포탄 던지기, 스코틀랜드 목장 경비원들의 쇠 던지기 등 학설이 다양하다. 어쨌든 1896년 제1회 근대올림픽부터 정식종목의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원로’다.

포환의 무게는 남자가 7.26㎏, 여자가 4㎏이다. 남자 포환은 성인 남성이 한 손으로 들고 있기에도 벅찰 정도고, 여자 포환도 건장한 남성이 있는 힘껏 던져도 10m를 넘기지 못한다. 포환은 목에 댔다가 손으로 밀어 던져야 한다. 야구공 던지듯이 던지면 팔이 빠질 위험이 크다. 포환은 여름에 열을 받으면 엄청나게 뜨거워지고, 겨울에는 얼음처럼 차가워진다.

우리에게도 포환의 전설이 있었다. 백옥자(61)씨는 1970년과 74년 아시안게임 포환던지기 2연패를 달성해 ‘아시아의 마녀’라는 별명을 얻었다. 백씨는 그 시절을 회고한다. “우리 때는 정말 죽기살기로 했어요. 하루에 500개 던지는 건 보통이었고, 1000개까지 던진 적도 있었죠. 지도자들이 체계적으로 공부하고 자신감을 심어줬다면 세계 정상까지 갈 수 있었을 텐데….”

백씨의 최고 기록은 16m28㎝다. 40년이 흐른 뒤 이번 대회에 출전한 한국 선수(이미영)의 기록은 16m18㎝로 오히려 퇴보했다.

세계 정상권에 근접한 적도 있었다. 1999년 세계선수권에 출전한 이명선은 19m36㎝를 던져 10위에 올랐다. 이번 대회 8위에 해당하는 기록이다. 대전시청 육상부 감독을 맡고 있는 이씨는 “포환던지기는 여자가 하기에 부적합한 종목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아름다움이 있어요. 짧은 시간에 섬세한 근육의 움직임이 필요하고, 어떤 기술을 구사하느냐에 따라서 나보다 덩치 큰 상대도 이길 수 있습니다. 도를 닦는 마음으로 무거운 쇠공과 씨름해야 하지만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이기면 큰 성취감을 얻을 수 있지요”라고 말했다. 이 감독은 “포환은 투척의 기본 종목이지만 외국에서도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해요. 선수층이 두텁지 않아 우리도 전문 지도자가 유망주를 꾸준히 지도하면 세계 정상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고 희망을 이야기했다.

요즘 선수들의 생각은 어떨까. 초등학교 5학년부터 대학까지 선수를 했던 강아름(23)씨. 한국체대 스포츠코칭대학원에 재학 중인 그는 “솔직히 포환던지기의 재미나 매력은 잘 모르겠어요. 열심히 해도 기록이 늘지 않다가 어느 순간 ‘넘을 수 없다’ 싶었던 기록을 깰 때, 그때 전율을 느낀 적은 있죠”라고 했다.

포환던지기를 하면 어깨가 벌어지고 몸이 커질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느냐고 묻자 그는 “어릴 때는 잘 몰랐어요. 사춘기가 되니까 ‘내가 왜 이렇게 됐지’ ‘이 지경이 되도록 왜 그냥 놔뒀지’라고 후회가 몰려왔어요. 그래도 ‘운동 그만두고 살 빼면 될 거야’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는데…. 다시 작아질 수 없다는 걸 이젠 알죠”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여자 선수들은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쓴다. 외출할 때는 정성껏 화장을 하고 귀고리와 액세서리로 멋을 낸다. 동대문 빅사이즈 매장에 가서 최신 유행 옷을 고르는 게 큰 즐거움이다.

국내 여자 포환던지기 실업 선수는 10명 남짓이다. 대학에도 그 정도 선수가 있다. 그녀들은 오늘도 묵묵히 쇠공을 던진다. 무심한 쇳덩어리에는 그들의 답답한 현실, 불안한 미래, 그래도 놓아버릴 수 없는 희망의 몸짓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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