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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울림’ 없는 대법원장 인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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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

“법원에 대한 국민의 시선이 싸늘해지는 것을 보며 왜 이런 모습을 보여줘야만 하는지 가슴이 아프다.”

 이용훈 대법원장은 얼마 전 청주지법을 방문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음 달 임기 만료를 앞둔 아쉬움과 회한이 묻어난다. “권위주의에서 탈피해 국민과 호흡하겠다”고 선언했던 그였다. 취임식부터 법복 대신 양복을 입는 파격을 택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난 6년간 사법부를 관통한 키워드는 불화(不和)였다. 시대 상황 탓도 있었지만 이 대법원장 자신이 자초한 측면도 적지 않았다.

임기 초반, 의욕이 앞선 발언으로 검찰·재야법조계의 반발을 샀다. 2008년 정권 교체 후에는 정치권력과 불화했다. 촛불집회 재판에서 재판 개입 논란, 국회 사법개혁까지 사법부가 갈등의 한복판에 섰다. ‘강기갑 공중부양’ 무죄 같은 ‘튀는 판결’이 잇따르며 “판결이 오히려 사회 불안을 키운다”는 우려가 번져나갔다.

 이제 ‘이용훈 시대’가 저물고 있다. 그의 뒤를 이을 새 대법원장 지명이 임박했다. 그런데 대법원장 인선이 왠지 맥 빠진 분위기다. 법조계에서도 법원을 빼놓고는 큰 관심이 없다. 법원 내부조차도 대법원장이 누구냐를 놓고 긴장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 이유는 뭘까. 우선 후보군이 제한돼 있다. 판사 출신의 현직 대법관·헌법재판관 중에서 고르다 보니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경쟁 구도가 형성되지 않는다. 한 판사는 “후보들이 압축됐다는데 솔직히 어떤 부분이 다른 분들인지 모르겠다”며 말끝을 흐렸다. “다 비슷한 경로를 걸어온 분들 아닙니까. 나이, 출신 지역·학교, 사법연수원 기수 빼고는….”

 무엇보다 새 대법원장이 맡아야 할 시대적 과제가 뚜렷하게 부각되지 않고 있다. 목표가 명확했던 ‘노무현식 사법개혁’과 대비된다. 노무현 정부는 법원의 우위를 확보해 검찰 수사를 견제하고자 했다. 대법관 임명과 과거사 정리를 통해 법원에 진보의 바람을 불어넣으려 했다.

 반면 이번 대법원장 인선에선 법원의 오늘과 내일을 고민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같은 사안(전교조 시국선언)에 대해 3대1, 4대2로 유·무죄가 갈리면서 “재판이 무슨 축구경기냐”라는 비판이 나오는 상황은 정상이 아니다. 법률보다 개인의 양심 내지 정치적 성향을 앞세워야 존경 받는 판사인 양 비쳐진다면 법관 사회가 잘못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보수냐, 진보냐의 문제가 아니다. 사법의 기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법치주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각오의 목소리는 어디에서도 들리지 않는다.

 이번 주 대법원장 후보가 지명되면 인사청문회가 열리게 된다. 이번 청문회도 위장전입을 했는지, 재산이 얼마나 많은지만 따지고 넘어간다면 사법의 모습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대법원장 후보 역시 자신이 믿는 사법 개혁의 밑그림을 분명하게 내놓아야 한다. 판사들의 일탈을 징치(懲治)할 수 있다는 결기를 보여야 한다. 그런 과정을 거쳐 한국의 법치주의는 혼선과 미망을 걷어내고 시대와 사회에 대한 울림을 갖게 될 것이다.

권석천 사회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