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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드리브도 각본 … 8인의 ‘PT 드라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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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겨울올림픽 유치에 나선 평창 유치위원회의 최종 프레젠테이션 장면. 나승연 유치위 대변인, 조양호 유치위원장, 이명박 대통령, 김진선 특임대사, 김연아 선수, 문대성 IOC 선수위원, 박용성 대한체육회장, 토비 도슨의 순서로 발표가 진행됐다. [그래픽=김주원 기자]<사진크게보기>


‘평창의 꿈’이 이뤄지면서 2018년 겨울올림픽 유치전은 막을 내렸다. 그러나 평창의 완벽한 최종 프레젠테이션(PT)이 준 감동은 두고두고 화제가 되고 있다.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유치위원회는 6일(한국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에서 투표자들을 앞에 두고 최종 PT를 진행했다. 나승연 유치위 대변인과 이명박 대통령, 2010년 밴쿠버 겨울올림픽 피겨 금메달리스트 김연아 선수까지 모두 여덟 명의 발표자가 PT에 나섰다. 완벽한 발표 사이사이에 청중의 긴장을 풀어주는 유머가 녹아 있었고, ‘피겨 여왕’ 김연아 선수가 진심을 다해 평창의 지지를 호소할 때는 박수가 터져 나왔다.

 PT가 끝난 후 경쟁 도시였던 프랑스 안시 관계자가 평창 유치위에 찾아와 “감동적이었다”고 인사를 건넸고, AP통신 등 외신 기자들은 “평창이 홈런을 쳤다”고 했다. 평창의 최종 PT는 최근 몇 년간 국제대회 유치 경쟁 PT 중 최고라는 찬사를 듣기에 충분했다. 

#‘PT 마스터’ 잡스를 뛰어넘는 PT

 감동을 담은 프레젠테이션 영상은 한국과 영국·미국의 기술로 완성됐다. 영상과 내용은 한국의 제일기획과 영국의 뉴문, 미국의 헬리오스파트너스의 브레인들이 참여해 만들었다. 평창은 영상 제작 전문업체인 뉴문을 영입해 2010, 2014년 대회 유치에 도전할 때에 비해 한층 업그레이드된 작품을 만들었다. 헬리오스파트너스와는 전략적 관계를 맺었다. 컨설팅회사인 헬리오스파트너스는 8년 전 밴쿠버, 4년 전 소치의 유치 활동을 도왔다. 올림픽 전문 컨설턴트로 유명한 헬리오스파트너스의 테렌스 번스 사장은 PT를 할 때 연사들의 시선 처리부터 손짓·몸짓 등 세세한 동작까지 조언했다.

이병남 평창 유치위 평가준비처장은 “지난 2월 실사단의 평창 실사가 끝난 직후부터 본격적인 PT 준비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평창의 최종 PT는 ‘프레젠테이션의 달인’으로 불리는 스티브 잡스(애플 최고경영자)의 PT 이론을 충실하게 따르면서도 그 이론 이상의 파장을 줬다. 2008년 미국의 경제전문지 비즈니스위크는 잡스의 PT 기법 10가지를 소개했는데, 이에 따르면 훌륭한 PT는 ▶주제를 정하고 ▶열정을 표현하며 ▶쇼를 보여주고 ▶장점을 팔되 ▶반복해서 연습해야 한다.

 평창은 겨울 스포츠의 지평을 넓히는 ‘새로운 지평’이라는 주제를 갖고 겨울올림픽을 열어야 하는 당위성을 빈틈없이 설명했다. 평창의 PT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갔다. ‘감동’과 ‘캐릭터 부여’를 더해 생동감 넘치는 PT를 만들어냈다.

 평창이 이번 PT에서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이 바로 ‘감동’이라는 키워드다. 이병남 처장은 “최근 국제대회 유치 경쟁PT의 트렌드가 있다. 바로 투표인단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도록 감성에 호소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평창은 2010년과 2014년 겨울올림픽 유치에도 나섰지만 모두 실패했다. 당시 PT에서는 장점을 기계적으로 열거하는 데 그쳤고, 이산가족 할머니의 사연으로 감동을 주려 했던 게 실패 원인이었다는 내부 평가가 나왔다. 이병남 처장은 “그동안 한국은 ‘분단’과 ‘평화’를 앞세운 감동 전략을 주로 썼다. 하지만 이번에는 순수하게 스포츠에 기반한 감동을 이끌어내도록 했다”고 말했다.

 김연아가 “또 다른 김연아가 나오게 해 달라”고 진심 어린 표정으로 말했을 때 이를 지켜보던 많은 이의 마음이 움직였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입양된 후 2006년 토리노 겨울올림픽 모굴스키에서 동메달을 따냈던 토비 도슨의 PT도 깜짝 카드였다. 도슨은 “내가 운 좋게 미국에서 누렸던 기회를 다른 나라 어린이들이 누릴 수 있게 해 달라”며 평창 지지를 호소했다.

 평창이 지난 두 차례 유치 실패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겨울올림픽 유치에 도전했다는 사실도 감동으로 다가갔다. 이미 두 차례나 실패했다는 사실을 강조한 게 구차한 ‘동정표 구걸’로 비치지 않았다. 발표자들이 이를 당당하게 밝히고 때로는 유머 코드로 이용했기 때문이다. 나승연 대변인은 첫 발표에서 “우리는 그동안 두 개의 중요한 단어에만 집중했다. 끈기와 인내심”이라고 화두를 던졌고, 박용성 회장은 “모나코 알베르 대공이 신혼인데 세 번째 평창의 유치 PT를 보게 해서 죄송하다”고 농담했다. 

# 확실한 캐릭터 부여와 열정적인 팀워크 

2018 평창 겨울올림픽 개최지 발표를 알리는 자크 로게 IOC 위원장의 사진이 게재된 본지 7월 7일자 신문이지하철 가판대에 전시돼 있다. [AP=연합뉴스]

 8명이 번갈아가면서 PT에 나서면 자칫 발표가 산만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평창의 PT에서는 각각의 발표자에게 캐릭터를 부여했고, 각자가 명확하게 자신의 주제를 전달했다.

 특히 나승연 대변인과 김연아 선수는 미모와 달변을 동시에 갖췄다는 개인적인 매력까지 더해져 눈길을 사로잡았다. 나 대변인은 그동안 겨울올림픽에서 소외됐던 지역에서 올림픽을 열어야 많은 이에게 꿈과 희망을 줄 수 있다는 당위성을 침착하게 설명했다.

 김연아는 네 번째 발표자로 나와 전체 PT 내내 청중의 집중도가 떨어지지 않도록 했다. 냉철한 이미지의 나 대변인과 달리 김 선수는 깜찍한 몸짓과 눈웃음으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었다. 유치위 평가준비처의 정일섭 팀장은 “PT 기획단계부터 김연아를 발표자로 세워야 한다는 계획이 있었다”고 했다.

 평창은 2014년 유치전 때만 해도 전면에 내세울 겨울올림픽 스타가 없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스키 황제’ 알베르토 톰바(이탈리아)가 영상 메시지를 남기는 형식의 PT를 만든 바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김 선수의 등장에 박수가 터져 나왔고, PT가 끝난 후에도 IOC 위원들이 김 선수에게 대거 기념촬영을 요청했을 정도로 인기가 높았다. PT 도중 김 선수의 어린 시절 사진이 영상물로 나오면서 ‘꿈’이라는 단어가 IOC 위원들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약속한 것도 임팩트가 있었다. 정일섭 팀장은 “영어 PT는 대통령이 자청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투표인단에 더 어필할 수 있었다”며 “더반에서 대통령이 예정에 없이 유치위 숙소를 찾아와 PT 연습을 하는 등 누구보다 열정적이었다. 정말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박용성 대한체육회장의 ‘알베르 대공 농담’은 철저한 시나리오였다. PT가 성공적으로 진행되기 위해서는 인상적인 농담이 반드시 필요했고, 최근 국제사회에서 화제가 된 알베르 대공의 결혼을 주제로 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PT 준비팀은 이 농담을 할 적임자로 박 회장을 선택했다. 늘 웃는 인상에 달변인 박 회장이 다른 발표자들에 비해 애드리브에 강하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실제 PT 무대에서 박 회장의 농담에 장내는 웃음바다가 됐고, 정 팀장은 “그 정도로 반응이 좋을지는 우리도 예상 못했다”고 했다.

 각자의 발표 주제도 명확했지만 최선을 다해 준비하겠다는 열정도 대단했다. 정일섭 팀장은 “김진선 특임대사는 지난달 말 딱 하루 동안 스케줄이 비었는데 하루 종일 PT 연습을 하더라. 문대성 위원은 4일에야 더반에 도착했지만 이틀간 잠도 안 자고 연습했다. 원고를 통째로 외운 것은 물론이고 어느 부분에 악센트를 줄지 일일이 코치를 받으면서 연습했다”고 설명했다. 진심이 녹아 있는 팀워크가 PT를 빛냈고, 평창 유치가 결정되자 김연아 등 일부 발표자는 눈물을 흘렸다.

이은경 기자

*평창 겨울올림픽 PT 하이라이트 동영상은 본지 홈페이지 동영상으로 볼 수 있다. 하단의 QR코드를 이용하면 휴대전화로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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