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자인 불륜’ 수사하라 … 미 상원, 동료를 고발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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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존 엔자인

미국 상원 윤리위에는 구두선(口頭禪)이 없었다. 선거법과 의회 윤리규정 등을 위반한 혐의로 윤리위의 집요한 조사를 받던 동료 의원이 “내가 물러날 테니 이제 그만하자”며 의원직을 사퇴했다. 그러나 윤리위는 “물러나는 것과 상관없이 조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공언했다. 미국인들도 “결국은 동료 의원을 감싸겠지” 하며 반신반의(半信半疑)했다. 윤리위는 그러나 해당 인사의 부끄러운 행적이 드러난 조사 결과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것도 모자라 사법당국의 개입을 요구하고 나섰다. 추상(秋霜) 같은 자기 통제의 모습이다. 동료 의원의 부정과 불법에 대해서는 어물쩍 넘어가는 한국 국회와 대조된다.

 상원 윤리위는 12일(현지시간) 약 2년에 걸친 존 엔자인(John Ensign·53·네바다주·공화) 전 연방 상원의원에 대한 조사 결과를 발표하며 “묵과할 수 없는 위법 사실을 확인했다”며 법무부와 연방 선거관리위원회에 수사를 요청했다. <중앙일보 4월 25일자 16면>

 엔자인은 수려한 외모와 뛰어난 언변으로 한때 공화당의 대통령 후보감으로 꼽혀온 인물이었다. 그러나 2007년 자신의 선거 참모로 일하던 기혼 여성과 혼외관계를 맺으면서 일이 틀어졌다. 역시 선거 참모였던 이 여성의 남편에게 불륜 사실을 들키자 9만6000달러(약 1억원)를 건넸다. 또 남편이 부적절한 로비스트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뒤를 돌봐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이 공개되면서 연방 선거법과 의회 윤리규정 위반 논란이 일었다.

 상원 윤리위는 특별조사관을 임명해 조사를 벌였다. 엔자인은 공화당 정책위원장직을 사퇴하고, 차기 총선 불출마 선언까지 하면서 사태가 진정되길 바랐다. 그러나 윤리위는 지난 4일 엔자인을 공개 증언대에 세우겠다고 압박했다. 엔자인은 지난달 21일 “불법은 없었지만 더 이상 주변 사람들을 조사에 휘말리게 할 수 없다”며 의원직 사퇴를 발표했다. 공식 사퇴 시점은 증언일 하루 전날인 지난 3일이었다.

 윤리위에는 사퇴한 의원에 대한 징계권이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관행대로 ‘엔자인 사건’이 종료될 것으로 짐작했다. 그러나 바버라 복서(Barbara Boxer·71) 윤리위원장은 “엔자인의 의원직 사퇴는 적절하지만 조사는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12일 윤리위가 공개한 보고서에는 엔자인의 혼외정사를 둘러싼 협박과 회유, 거짓과 은폐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보고서는 또 엔자인이 증거를 은폐하기 위해 관련 문건을 없애고 허위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복서 위원장은 기자회견에서 “엔자인은 상원 윤리규정과 연방 민·형법을 위반했으며, 여타 부적절한 행위에도 개입했다”고 말했다. 이어 “위원회는 불법 행위에 대한 실질적이고 신뢰할 만한 증거를 확보했다”며 “법무부와 선관위가 이 사건을 맡아 수사를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엔자인의 변호인단은 “과오 인정과 의원직 사퇴는 정치인이 스스로에게 내린 최고의 제재”라며 “위법 행위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윤리위 특별조사관 캐럴 브루스는 “엔자인이 의원직을 사퇴하지 않았다면 (위법 증거를 통해) 의원직을 박탈당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워싱턴=김정욱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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