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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판사 과잉 배려 … 씁쓸한 ‘부장판사 매뉴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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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구희령
사회부문 기자

‘여성 판사 주의보’. 기자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최근 서울중앙지법의 일부 부장판사가 공유한 ‘여성 배석판사들과 함께 근무하는 부장판사의 유의점’이라는 매뉴얼 얘기다.

 6쪽 분량의 매뉴얼에는 ‘배석판사 두 분이 모두 여성인 경우 부장판사가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사항을 정리한 것’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다. ▶여성 판사들이 재판 기록을 들고 오는 수고를 덜 수 있게 부장판사가 배석판사 방으로 직접 가서 판결 합의를 하고 ▶식사 시간 대화를 위해 아이돌 그룹, TV 드라마 등에 관해 가벼운 정도라도 관심을 가질 것을 권하는 등 약 40개 항목에 걸쳐 ‘여성의 특성을 고려한 배려’를 정리해 놓았다. ▶<본지 3월 28일자 20면>

 ‘여성은 아침에 바쁘므로 아침 인사를 받지 말되 너무 늦게 출근하지 않도록 권유할 수는 있다’는 등 함께 일하는 후배 판사를 대하는 법이라기보다는 어렵고 껄끄러운 상대에게 책 잡히지 않는 법을 정리해 놓은 듯했다. 기자만의 생각일까.

이 ‘세심한 배려’를 여성 배석판사들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다. 대개 7~8년차 이하인 여성 배석판사들에게 물어봤다. 기자가 받은 인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취지는 알겠지만 당황스럽다” “부담스럽다. 지나친 배려다” “불쾌하고 어이없다”는 반응이었다.

 “공주 대접 받고 싶지 않아요. 솔직히 저희 여자 판사들이 체력적으로도 약하진 않아요.”

 “(무거운) 재판 기록도 우리 힘으로 다 들 수 있어요. 아이돌 그룹이나 TV 드라마 얘기를 화제 삼고 싶지도 않고요.”

 이들은 “특별한 대우가 아니라 (남성과) 똑같은 대우를 받고 싶은데 왜 그걸 모르느냐”고 입을 모았다. 한 여성 판사는 “여성 판사에 대해 선입견을 갖게 되면 판결도 불신할까봐 걱정”이라고 말했다.

 올해 신임 판사 81명 중 53명이 여성이다. 3분의 2가량 된다. 원하든 원치 않든 여성 배석 판사로만 재판부를 구성해야 하는 남성 부장판사들은 점점 늘어날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복잡한 매뉴얼 대신 단순 명쾌하게 딱 하나만 기억하자. ‘여판사’가 아니라 ‘판사’다. 어느 4년차 여성 판사의 말을 전한다. “여판사라는 단어를 아예 안 썼으면 좋겠어요. ‘남판사’라는 말은 없잖아요?”

구희령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