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파까지 번진 포퓰리즘 망령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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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30면

김대중 정부에서 가장 실패한 경제정책은? 정권 마지막 해인 2002년 기준금리 인상 시기를 놓친 것을 꼽고 싶다. 물론 다른 것을 떠올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2000년 전후 코스닥 주식에 손댔다가 손실을 본 투자자라면 ‘닷컴 버블’을 말할 게다. 외환위기 이후 반도체 사업을 빼앗긴 LG그룹 사람들은 ‘빅딜(사업 맞교환)’이 마음 한구석에 남아있을 것이다.

고현곤 칼럼

하지만 광범위하게, 지속적으로, 지금까지 부담을 주고 있는 것은 단연 2002년 금리정책이다. 당시 시중에 너무 많은 돈이 풀려있었다. 그 결과 부동산 시장에 이상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가계 빚은 빠르게 늘었다. 당연히 기준금리를 올려 돈줄을 조여야 했다. 정부는 그러지 않았다. 2002년 5월에 기준금리를 4%에서 4.25%로 한 차례 올리긴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언 발에 오줌 누기였다. 신용카드사들은 길거리에서 미성년자에게 마구잡이로 카드를 내주면서 온돌방을 활활 지폈다. 정부는 애써 모른 척했다. 덕분에 소비가 늘어 경제가 좋아지고 있으니 좀 놔두면 안 되겠느냐며.
결과는 끔찍했다. 이듬해인 2003년 카드대란이 터졌고, 신용불량자가 쏟아졌다. 시중에 풀린 돈이 부동산으로 몰리면서 노무현 정부 내내 부동산 광풍이 부는 단초가 됐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 버블을 보수층·부유층의 탐욕과 투기 탓으로 돌렸다. 실상은 성향이 비슷했던 김대중 정부의 금리정책 실패에 큰 원인이 있었다.

2002년 금리를 올리지 않은 게 단순한 정책판단 미스였을까. 그렇게 빨리 온돌방이 뜨거워질지 몰랐을까. 아닌 것 같다. 당시 경제부처 고위관료들은 사석에서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때까지 경기를 좋게 가져가야 한다”고 말하곤 했다. 경기가 좋아야 여당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그때만 해도 국내에서는 포퓰리즘(대중 영합주의)이라는 용어가 널리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선거를 앞둔 ‘은밀한 포퓰리즘’이었다.

포퓰리즘은 노무현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실체를 드러냈다. 2003년 초 노무현 대통령직 인수위원회는 결산백서를 내면서 “더 많은 포퓰리즘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노무현 정부는 우리 경제를 ‘승자 독식의 카지노 경제’로 규정했다. 국민을 상위 20%와 하위 80%로 편갈랐다. 노무현 정부의 의도대로 하위 80%를 지지층으로 만들었다면 정권을 재창출했을 것이다. 국민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포퓰리즘의 허구를 알아차린 국민은 이명박 후보에게 50% 가까운 표를 몰아줬다. 포퓰리즘도 수명을 다하는 듯했다.

하지만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여당이 참패하자 상황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좌파가 포퓰리즘의 기치를 내걸면 우파가 끌어내리는 양상이었으나, 이때부터 좌·우파 가릴 것 없이 인기 경쟁을 시작했다. 포퓰리즘이 한차례 곡절을 겪으면서 더 광범위해지고, 질긴 모습으로 부활한 것이다.

한나라당은 ‘70% 복지’를 들고 나왔다. 국민의 70%를 복지정책의 대상으로 삼고, 각종 혜택을 확대하겠다는 것이다. 어디서 본 듯 하지 않은가. 노무현 정부의 ‘80% 우리 편 만들기’와 유사하다. 야당은 무상 급여·의료·보육의 ‘무상’ 시리즈로 한 술 더 뜨고 있다. 야당 내에서도 무리수라는 반발이 나올 정도다. 내년 대선·총선을 앞두고 이런 소모적 논란은 이어질 것이다.

여야가 달려들어 나라 살림을 좀먹기 시작하면 포퓰리즘으로 곤욕을 치른 남미 아르헨티나나 남유럽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 시점에는 어느 나라나 포퓰리즘 유혹에 쉽게 빠져드는 경향이 있어 더 우려스럽다. 한번 단맛을 보면 더 강한 맛을 찾게 마련이다. 포퓰리즘에 기대는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도대체 그 많은 돈은 누가 대는 건지. 세금 제대로 내본 적도 없는 사람이 자기 돈인 것처럼 생색내는 건 아닌지. 세금 많이 내는 사람이 애국자라는 사실은 알고나 있는지.

정치권은 속성상 그렇다 치더라도 정부는 중심을 잡아야 한다. 지난해 중반 이후 정부가 내건 친서민과 대·중소기업 상생은 바람직한 방향이지만, 그게 포퓰리즘으로 흘러가면 안 된다. 대통령이 기름값 같은 특정 품목의 시장가격을 콕 짚어 언급하거나 청와대 수석이 치킨 값을 문제 삼는 것으로는 상황이 꼬일 뿐이다. 정부의 시장 개입은 당장은 통쾌해 보이지만,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다. 갈수록 거세지는 포퓰리즘의 물결도 막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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