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북한 김영희 칼럼

대북 지원, 많고 빠를수록 좋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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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농림수산식품부가 8월 말에 내어놓은 ‘쌀 수급 안정 대책’이 걸작이다. 떡, 빵, 국수류, 과자, 막걸리, 떡볶이의 제조원료를 확대하고, 햇반, 냉동볶음밥, 찐쌀 같은 자체 이용 제품을 늘리고, 쌀과 쌀가루를 쉽게 조리할 즉석조리기계를 많이 보급할 방침이다. 대형 매장에 쌀가루 제품 코너도 만든다. 아이들은 떡볶이를 실컷 먹고 어른들은 애국하는 정신으로 막걸리를 취하도록 마시게 됐다. 정부는 묵은쌀을 가축용 사료로 쓰고 싶지만 농자천하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의 나라에서 국민정서상 그럴 수도 없다.

쌀이 넘쳐서 혼란스러운 남한과 대조적으로 북한은 식량난으로 국민들의 불만이 비등하고 있다. 2009년 11월에서 2010년 10월까지가 북한의 2010 양곡연도인데 농촌진흥청에서 계산한 이 기간의 북한 식량생산량은 411만t이다. 북한이 필요로 하는 식량 520만t에서 100만t 이상이나 모자란다. 설상가상으로 여름에 북한의 곡창지대가 큰 홍수를 만나 2011 양곡연도의 식량생산은 올해보다 20만t 이상 감소될 전망이다.

김정일이 제아무리 맹물 먹고 이빨 쑤시는 허세를 잘 부려도 다수의 백성들이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상황을 오래 방치할 수는 없다. 천안함 사건 아니었으면 아마도 북한은 남한에 더 일찍 손을 벌렸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체면 불고하고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북한의 쌀 지원 요청이 김정일이 최근 중국 방문 중에 구상한 것이라면 더욱 쌀 지원의 효과가 기대된다. 최근 중국을 방문한 일본 아사히신문의 후나바시 요이치 주필은 김정일이 후진타오에게 앞으로는 한국과 미국에 더 유연한 자세를 취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쌀과 굴착기와 비료 좀 달라는 요청을 남한에 대한 북한의 태도 완화의 신호로 해석하는 것은 비약이다. 그러나 변화를 유도할 수는 있다. 쌀을 주고받자면 남북한의 적십자 회담이 필요하다. 적십자 회담은 당국자 회담으로 발전할 수도 있다. 1970년대 초 역사적인 닉슨 방중(訪中)과 미·중 데탕트도 핑퐁외교로 시작됐다.

이명박 대통령은 ‘심오하고 현명한’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어서 대북 지원을 신중하게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대통령이 거론한 국민의 40%가 대북 지원을 시기상조로 본다는 여론조사는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가. 그 40%도 대북 지원에 공감은 한다고 했다. 대통령은 옳은 정책은 반대하는 국민을 설득하면서 추진해야 한다. 쌀을 주면 막힌 남북관계가 뚫릴 수도 있고 뚫리지 않을 수도 있지만, 주지 않으면 그런 기회를 만들지 못한다. 북한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지금의 남북관계의 상황에 맞지 않는 소극적인 태도다. 기회를 능동적으로 만들어야 한다. 남한은 2001년과 2006년을 빼고는 2000년부터 2007년까지 해마다 30만, 40만, 50만t의 쌀을 10년 거치, 20년 상환의 조건으로 북한에 지원했다. 북한은 거치기간이 끝나는 올 10월부터 남한에 쌀값을 갚기 시작해야 하지만 북한은 갚을 힘이 없고 남한은 받을 생각이 없다.

미국은 대북 추가 제재를 강화하고, 한국은 천안함 사건에 대한 사과를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제시한 상황에서 대북 지원 재개는 쉽지 않다. 그러나 대북 지원은 인도주의 차원을 넘어서 답답한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여는 큰 기능을 할 수도 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이 중요하다. 시간 너무 끌지 말고 결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지금의 숨 막히는 긴장 국면에 국민들은 피로하다. 천안함에 대한 사과를 먼저 하면 지원한다는 입장에서 저쪽이 어려울 때 쌀 주고 대화하면서 사과를 받는 것이 현실적이다. 중국은 대화 재개를 위해 북한과 한·미·러 설득에 발 벗고 나섰다. 미국의 제재 국면도 요지부동한 건 아니다. 곧 수면 위로 올라올 대화 모드에 우리만 뒤떨어질 수는 없다.

중국이 앞장서고 미국이 뒤따르는 6자회담 재개를 위한 협상 과정에서도 천안함 처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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