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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성인을 기대했던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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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12세기의 교회는 그 여세를 몰아 교권을 확립했고, 인노켄티우스 3세(재위:1198~1216) 시대에 교황권은 절정에 달했다. 인노켄티우스의 말마따나 ‘교황은 해, 황제는 달’이었다. 서유럽 교회는 교황을 수장으로 하는 교황 군주국가로 편성됐고, 교황은 마치 세속 군주처럼 행동했다. 권력과 재산이 불어나자 이를 관리할 교회법의 중요성이 커졌다. 그 결과 12세기 중반 이후 교황들은 대부분 교회법학자 출신이었다. 인노켄티우스 역시 교회법학자였다. 그레고리우스 등 11세기 개혁 교황들이 수도사 출신이었던 것과 대비된다. 교회의 권력이 커지고 복잡해지면서 나타난 불가피한 결과였다.

문제는 이때부터였다. 부자 교회가 되면서 고위 사제들은 나날이 사치스러워졌다. 권력 맛, 돈맛을 본 교회가 법률과 재무행정에만 골몰하자, ‘순수한 영혼들’은 한때 도덕성과 영감의 원천이었던 교회가 궤도를 벗어났다고 의심을 품었다. 민심 이반이었다. 급기야 교황의 통제권 밖에서 청빈과 금욕을 강조하는 급진적 종교 집단이 출현했다. 이 집단은 남프랑스에서 큰 세력을 형성했는데, 이곳은 가톨릭 사제들이 특히 타락한 지역이었다. 반교황파 사제들은 대단히 엄격한 금욕생활을 실천했는데, 그들의 철저한 도덕성은 사치와 부패로 지탄 받던 가톨릭 사제들과 뚜렷이 대조되었다. 반교황파 세력은 남프랑스에서 확고한 지역 기반을 구축했다.

12세기 후반의 교황청은 사제들을 보내 이들과 논쟁을 벌여 교리상의 오류를 깨닫게 만들고자 했으나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사제 집단의 도덕성을 불신하는 그들에게는 어떤 논리적인 설득도 소용이 없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사제들의 타락을 바로잡아 교황 반대파가 비난할 구실을 없애는 것이었다. 실제로 인노켄티우스는 이 방법을 시도했다. 그러나 너무나 넓고 깊게 뿌리내린 부패를 척결하기란 어려웠다. 타락한 대주교 한 명을 축출하기 위해 교황청이 수년 동안 격렬히 투쟁해야만 했을 정도였다. 하물며 성직자 전부를 대상으로 쇄신을 단행하기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교황에게 남은 한 가지 대안이 있긴 했다. 부적격 사제를 제거할 수는 없어도, 반교황파 사제들에 못지않게 도덕적이고 청렴한 사람을 교회 조직에 영입할 수는 있었다. 그러면 교회는 ‘모든 사제로 하여금 청빈한 삶을 살게 할 수는 없지만, 그런 생활을 하는 사람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할 수는 있었다. 이런 의도에서 발탁된 세력이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가 설립한 프란체스코 수도회였다. 인노켄티우스는 참신한 도덕적 세력인 이 수도회를 인가함으로써 교회 내에 순수한 열정의 불씨가 유지되도록 했다.

케케묵은 중세 이야기는 작금의 청문회 정국과 비교된다. 2004년 한나라당은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씻기 위해 천막당사로 옮긴다. 낮은 자세로 국민의 믿음을 얻는 데 성공한다. 국민은 마침내 이명박 대통령 시대를 열고 거대 여당을 만들어 준다. 개혁 교황의 카리스마에 열광한 제1차 십자군을 연상케 한다. 그러나 끝내 부자 정권의 본색을 감출 수는 없었던 걸까. 불법·비리·거짓말로 얼룩진 후보자들의 모습은 부패 사제들이 넘치던 인노켄티우스 시대의 부자 교회를 연상케 한다. 청문회 정국이 소강 국면에 접어들자 이번엔 ‘장관 딸 특채 소동’이 기득권 세력의 도덕성 수준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인노켄티우스는 청렴하고 유능한 프란체스코를 발탁해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언제 우리 국민이 프란체스코 급의 성인(聖人)을 기대했던가. 성인은커녕 상식 이하의 인물들이 무시로 돌출하니 절망·분노하는 거다. 미덥지 못하기는 야권도 마찬가지다. 12세기 반교황파가 남프랑스 민초들의 확고한 지지를 얻은 원동력은 청빈과 금욕이었다. 하지만 야권에 과연 그런 엄정한 도덕성이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래저래 기댈 데 없는 국민만 딱하게 됐다.

박상익 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