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with] 진숙이의 '꿈같은 외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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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공항 로비 한 쪽에서 테니스 라켓을 품고 앉아 몇 번이고 허벅지를 꼬집어 봤다. 정말 꿈이 아니구나. 난생 처음인 해외여행, 그것도 그랜드슬램 대회 중 하나인 호주오픈을 관람하다니. 게다가 '테니스 천재' 마크 필리포시스(호주) 선수의 전 코치에게 레슨도 받는다니. "테니스 꿈나무에겐 로또 당첨이나 다름없는 횡재"라며 등을 두드려 주던 코치님과 나보다 더 기뻐하던 엄마 얼굴이 계속 아른거린다. 두 분을 위해서라도 이번 경험을 슬럼프를 벗어나는 발판으로 삼아야 할 텐데.

◆ 경력 8년차, 슬럼프가 찾아오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시작한 테니스. 소질이 있다는 당시 코치님의 말에 엄마는 운동을 시키기에 빠듯한 살림을 걱정하면서도 "돌아가신 아버지는 학생 때 축구선수였고 나는 핸드볼을 했었는데 역시 피는 못 속이나 보다"라며 흐뭇해 하셨다. 왼손잡이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복식 경기를 주로 하며 6학년 때 전국소년체전에서 우승하는 등 좋은 성적을 올렸다.

조금씩 실력이 처진다고 느끼기 시작한 것은 고등학교 진학 이후. 기술은 연습으로 다질 수 있었지만, 어쩌다 시합이 길어지면 급격히 떨어지는 체력이 문제였다. 지난해 전한국주니어선수권대회 복식부문에서 우승했지만 시합 종반에는 뛰는 것조차 힘에 부쳐 파트너에게 의지해야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상까지 입었다. 두달 전 대구상고 테니스팀과의 연습게임에서 의욕이 앞서 남자 선수들을 상대로 무리하다 왼쪽 어깨의 근육을 다친 것. 그 탓에 다음달 뉴질랜드에서 열리는 오클랜드 주니어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됐다. 복식 파트너인 보라는 결국 다른 선수와 팀을 짜야 했다.

◆ 우상의 사인 볼에 힘을 얻다

내 처지를 생각하며 우울해 한 것도 잠시. 자리를 잡고 앉은 메인 경기장으로 여자프로테니스(WTA) 랭킹 1위이자 이번 대회의 강력한 우승후보인 린지 대븐포트(미국)가 들어서는 모습을 보는 순간, 모든 걱정이 사라졌다. TV 화면에서만 보던 '아줌마 테니스 여왕'이 내 앞을 걸어가다니. 대븐포트가 서브라인에 서자 시끌벅적하던 1만5000여 관중이 일시에 고요해지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 침묵의 순간, 얼마나 긴장될까. 호주의 대표 스타 레이튼 휴이트의 경기도 흥미진진. 날카로운 스트로크 기술을 주의깊게 보며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을까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최고의 행운은 전 세계 1위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스페인) 선수의 사인을 받은 것! 2003년 프랑스오픈 남자 단식 결승전 때 강력한 포핸드를 날리며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에 반해 팬이 됐다. 사인을 받은 모형 테니스공은 앞으로 내 행운의 상징이 될 것 같다. 소중히 간직해야지.

◆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개인레슨 시간. "굿, 굿(Good,Good)! 서브가 아주 좋군요. 기본기가 탄탄합니다." 바짝 긴장한 나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는 맥나마라 코치의 목소리가 자상하다. 하지만 역시 프로의 눈은 날카롭다. 기본동작을 몇 번 반복시키던 그가 대번에 "다리가 약한 것 같으니 종아리 힘을 기르도록 러닝 등 기초체력 훈련을 강화해야겠다"고 지적한다. 부상과 슬럼프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자 "나도 1983년 심각한 무릎 부상으로 선수생활을 포기할까 생각한 적이 있다"며 경험담을 들려줬다. 그의 충고는 부상으로 연습을 쉬거나 몸을 사리면 더욱 깊은 슬럼프에 빠지게 된다는 것. 훈련을 쉬고 있는 중이라고 하자 "당장 복귀하라"고 강조했다. 운동 강도는 조절하되 생활은 평소와 똑같이 유지하라는 것. 최근 몇 년 동안 한국 주니어 선수들을 위한 단기 레슨에 코칭 스태프로 참여했었다는 그는 한국 테니스의 전망을 밝게 봤다. "5년쯤 지나면 여자 골프에서 한국의 선전이 테니스로 이어질 것"이란다. 이유는 나를 비롯해 그가 만난 한국 선수들이 하나같이 기본 테크닉에 충실하더라는 것. 테크닉이 있으니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세계적인 선수가 될 수 있다는 격려였다.

레슨을 끝내기 직전 경기장을 힘차게 날아다니던 갈매기 한 마리가 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맥나마라 코치는 "호주에서는 새가 머리를 치고 가면 행운이 따른다고 믿는다"며 실력에 행운까지 더해졌으니 다음번엔 반드시 선수로서 이 경기장을 밟으란다. 그가 내민 손을 마주 잡으며 용기를 내서 대답했다. "아이 윌( I will:그러겠어요)." 그래, 지금부터가 시작이니까.

글=신은진 기자, 사진=강정현 기자, 후원=호주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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