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장 앉자마자 "한국 노조 두렵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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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노조는 두렵다. 이해하지 못할 정도다."(보슈의 루돌프 콜름 이사)

"한국 노조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익히 알고 있지 않은가."(BOC의 토니 아이작 회장)

경기도의 노사정 투자유치단은 한국의 강성 노동운동 기류에 대한 유럽 기업인들의 신랄한 비판에 처음부터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했다.

이재율 경기도 투자진흥관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고 혀를 찼다.

이화수 한국노총 경기도본부 의장도 "노조를 보는 눈이 아주 안 좋아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고 털어놨다.

◆ 강성노조로 홍역 치른 유치단=유럽 방문 이틀째인 14일(현지시간) 벨기에 브뤼셀의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이하 GSK) 회의실.

이 회사는 유치단이 유럽방문 동안 투자유치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기업이었다.

인플루엔자 백신 부문의 세계적인 기업인 GSK의 생산시설을 한국에 유치할 경우 한국은 GSK의 아시아 수출창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회사의 아시아지역 수출물량 비중은 전체 생산량의 60%에 이른다. 특히 연구개발센터 분소까지 유치할 경우 한국은 백신연구 부문에서 선진국 반열에 진입할 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하지만 GSK 측 인사들은 협상테이블에 앉자마자 노조문제를 꺼내며 유치단을 몰아세웠다.

장 스테파니 회장은 "한국은 노조가 아주 강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우리로선 투자를 주저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엔 임금도 크게 오른 것으로 안다"며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한국 노조에 대한 불신 때문인지 이날 GSK 측은 벨기에에 함께 온 이화수 의장을 아예 협상테이블에 초청도 하지 않았다.

유치단장인 손학규 경기도지사는 "이 의장의 협상테이블 참여를 노조의 경영침해로 여긴 때문인 것 같다"며 "한국 노조에 대한 그들의 부정적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해석했다. 손 지사는 이 의장의 유치단 합류 배경을 설명하는 것으로 그들의 의구심을 풀어나가야 했다.

"투자유치단에 노조 측 대표가 포함된 것은 불안정한 노사관계에 대한 여러분의 우려를 씻어주기 위한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이 의장이 동행한 것은 한국에 투자하는 모든 유럽 기업의 노사 안정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기 위해서라고 역설했다.

투자단의 기업 측 파견인사들까지 나서 최근 노조의 임금인상 요구 자제 등 세세한 노사 안정 노력까지 덧붙이며 장시간 설득하자 스테파니 회장은 마침내 "경기도와 기업의 보증을 믿겠다"며 투자의사를 표시했다.

◆ 투자유치에 발벗고 나선 노조 의장=독일 슈투트가르트의 보슈사에선 손 지사 대신 이화수 의장이 시험을 치렀다.

이 회사 루돌프 콜름 이사는 이 의장에게 "한국 노조는 왜 외국기업을 두렵게 하는가"라고 물었다. 심지어 "한국 내 파트너사와의 관계를 끊는 것까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했다.

이에 대해 이 의장은 "과거 강성노조가 외국기업뿐 아니라 국내기업조차 투자를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던 점을 인정한다"며 "하지만 (한국의 노조는) 달라지고 있다. 많은 노조가 이젠 일자리와 회사를 중시하고 있다"고 답했다.

그러자 이번엔 이 회사의 울리히 돌 사장이 "최근 현대중공업이 강성노조에서 탈퇴하는 등 변화가 있는 건 알지만 여전히 금속분야의 노조는 강성 아니냐"고 따졌다. 마치 한국의 노조상황을 훤히 꿰고 있는 듯했다.

이 의장이 다시 방어에 나섰다. 그는 "만약 보슈가 한국에 공장을 설립한다면 합리적인 노사관계를 이끌어 산업평화의 본보기를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정연국 현대자동차 이사도 거들었다. "한국 노조가 변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 의장의 말을 믿어도 좋다"고 지원했다.

정 이사의 발언이 나오자 보슈 측 참석자들의 박수가 터졌다. 콜름 이사는 "경기도의 투자제안서를 달라"고 요청했다. 양측은 2억달러 상당의 투자유치 상담추진에 합의했다.

◆ 투자유치 성과는 노사정의 합심 결과=경기도 투자유치단이 짧은 시일 내에 2억달러 이상의 투자유치 성과를 올릴 수 있었던 것은 노사정의 단합 때문이었다.

국내 노사문제를 물고 늘어지는 유럽 기업 관계자들을 입을 맞춰가며 집요하게 설득했다. 손 지사가 노사문제 해결의지를 설명하면, 이 의장의 다짐이 이어졌다. 여기에 기업 관계자들이 힘을 보탰다.

국내에서는 기아차 노조의 채용 비리 등으로 노사갈등이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똘똘 뭉쳐 투자유치의 장벽을 허물어뜨린 것이다. 정연국 현대.기아차 이사는 "우리가 아무리 얘기해도 설득이 안 되는 부분이 한국의 노사문제에 대한 외국 기업 경영진의 우려"라며 "노조 간부가 적극적으로 그들을 안심시켜 투자의 물꼬가 트인 것 같다"고 평했다.

슈투트가르트.파리.브뤼셀=김기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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